여자라서 겪은 서러움일까 (3)
다른 집을 알아보겠다고 선포한 4월 초.
며칠 뒤 집주인이 슬쩍 나를 떠봤다.
“새로 살 집은 구했어?”
구하고 말한 거지만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보일까 봐 거짓말했다. 아직 찾고 있는 중이라고.
그러더니 4월 말에 나가면 보증금 $900을 돌려줄 수 없는 것은 알고 있냐 물으셨다. 뭔 개소리야.
그렇게 왜 줄 수 없는지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다 필요 없고 상황 정리만 해보자면 이사한 지 이튿날 저녁, 전을 부쳤으니 같이 먹지 않겠냐는 말에 저녁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집주인이 전 세입자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가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잦아서 아줌마가 무서워서 내쫓고, 그 후에 여자하숙생만 받았는데 깨끗이 방을 안 써서 문제가 있었다는 둥 다들 2-3개월 살고 나갔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6개월은 살았으면 좋겠다 하시길래 “저도 오래 살 집 찾으려고 들어온 거지 몇 개월 살려고 찾은 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그럼 됐지 뭐“ 어쩌고 하시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이렇게 나눴던 대화를 가지고 “6개월을 채우지 않고 네 입으로 네가 나가겠다고 한 것이니 보증금은 돌려줄 수가 없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얘기를 들었을 때 충분히 내 의견을 말씀드렸고 최대한 예의 있고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지만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부터 싸했고 이사 들어가면서부터 다시 나올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니 더럽고 치사해서 보증금을 놓고 나올 마음이었다. 똥 밟았다 치자 싶었다.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너무 괘씸한 게 아닌가. 주변에 상황을 알리고 이 상황의 타당성부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보증금은 돌려받아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무료 법률상담으로 알아본 변호사도 같은 의견이었다. 일단 계약서가 없으니 6개월을 살지 않고 나가는 이유로 돌려주지 않는 보증금에 대한 것은 법적인 효력이 없고 안 주면 소액소송도 가능하다고. 그렇게 소송할 마음으로 알아보고 준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사 마지막주 화요일에 집주인을 찾아가 다시 말했다. Month-to-month 계약은 유효한 것이고 6개월 살아야 한다는 사항에 대해서는 집주인의 희망사항이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정확히 말 안 하시고 보증금에 대한 말씀도 없으셨다고. MtM 계약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날 저녁 보증금에 대해서도 확실히 말씀해 주셨다면 저도 더 확실하게 말씀드렸을 거다, 미국의 좁은 한인사회에서 나중에 어떻게 만날지도 모르는데 좋게 마무리 짓고 싶다, 객관적인 상황판단을 위해서 법적으로도 알아봤는데 돌려받지 못한 이유는 없다고 들었다, 등등. 한 시간가량을 서서 대화를 나눴다.
아니, 언성이 높아졌으니 싸운 건가? 벌벌벌 떨리는 심장을 무시하고 끝까지 최대한 차분하고 똑똑하게 말씀드렸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4월 말에 나갈게요. 그때까지 보증금 준비해 주세요”
처음 이 집에 들어오기 전 계약은 month-to-month라고 매월 월세를 내면 계약이 갱신되는 개념이다. 계약서를 쓴 것은 없고 한국과 미국에서 주고받은 카톡과 대면했을 때 한번 더 확인하고 들어온 것이 다였다. 모든 것이 다 구두로 이루어졌다. 계약서 없이 들어간 집은 처음이었지만 각자 방식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글로 풀어내기에는 너무 길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아 쓰진 않았다. 오르락내리락하던 마음과 6개월 같이 느껴지던 6일간의 스트레스. 인생의 상위 2번째로 치미는 분노와 억울함. 법적으로 가야 한다는 압박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마음. 신앙적인 갈등과 인간적인 마음의 충돌을 겪어내던 고민들.
그 와중에 취업한다고 면접 보러 다니고 이력서 준비하던 시간들.
내 안의 잠들어 있던 악마를 깨운 집주인 덕분에 파이팅 넘치는 시간들이었다.
이사하는 날이 다가왔다. 6일 동안 오며 가며 인사정도는 건넸으나 철저히 무시하던 집주인 할아버지, 할머니.
다행히 감사하게도 교회목사님과 건장한 남자 2분이 셋이서 짐을 옮겨주셨고 한 달 동안 고생하던 나의 마음이 무색하게 이사는 10분 만에 끝났다.
목사님께 미리 방 검사 (inspection)를 할 때 옆에 서계셔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그러곤 짐을 다 뺀 후에 집주인을 불러 방에 고장 난 것이나 대미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 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블라인드도 확인하시더니 그제야 딱 한마디 하셨다.
“키 줘봐 “
짜증은 났지만 미리 준비해 둔 편지서류 한 장을 가지러 잠시 차에 내려갔다 왔다. 캘리포니아 주는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시 이사 나간 후 21일 안에는 법적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였고 미래에 소액소송을 할 때 필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편지는 주머니에 넣어두고 키를 먼저 건넸다. 그러더니 집주인이 주머니에서 Check (수표) 한 장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900이 쓰여 있는 보증금이었다. 그대로 집주인은 화장실로 들어가 여기저기 살폈고 나와 목사님은 1층으로 내려왔다. 괜히 꼬투리 잡고 화장실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는 않을까 싶어 현관에서 잠시 기다렸으나 돈 돌려받았으니 그냥 나오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왔다.
‘진짜 돌려준 건가? 이렇게 그냥 줄 거면 여태 뭐 하러 나랑 이렇게 신경전 벌이고 사람을 못살게 굴었나’
바로 은행에 넣고 새집으로 출발하여 이사를 마저 마쳤다.
알고 보니 건장한 남자 3명이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수표를 쓴 것이었다.
1층 거실에서 2층짐을 내려받던 목사님이 말씀해 주셨다.
집주인의 정확한 생각은 당연히 알 수 없으나 나를 단순히 ‘나이 어린 여자애‘로 보고 줄 마음이 없었다가 집에 남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괜히 일이 커질 것 같으니 준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내 상황을 알던 모든 지인들과 엄마도 같은 의견이었다.
타지에 가족도 없이 혼자 생활하는 30살 여자.
Minor중의 minor 아니겠는가.
나를 만만하게 본 것에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이 나를 또 이렇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러워졌다.
앞으로 집을 찾을 때는 계약서를 꼭 써야겠다. 원래도 의심이 많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역시나 사람의 말을 다 믿으면 안 되겠다.
미국에 가족이 없는 것을 밝히면 안 되겠다. 혼자라고 인식되면 바로 약자가 돼버린다.
보편적으로 서른이면 결혼도 생각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자리를 잡아놔야 한다.
모은 돈도 조금 있어야 하고 어른의 행색을 갖췄거나 갖추어가고 있어야 한다.
이젠 주변사람들과 얘길 나누다 보면 서른은 적은 나이가 아니라고들 한다.
그래놓고 인생으로 보면 서른은 아직 애기다. 아직 도전해도 된다고, 아직 어리다고.
아직 어려도 갖출 건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애어른 취급을 당한다.
뭘 하면 두 가지 반응이다.
“아직 서른이니까 괜찮아” 또는 “이젠 서른이니까 잘 생각해 봐” 아오 어쩌라고.
어쨌든 또 인생레슨 하나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호구처럼, 만만한 것처럼 보이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