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여행 사진을 꺼내며 - 베를린
<꽃보다 할배>의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기존 멤버들에 김용건 씨가 추가된 이번 <꽃보다 할배 리턴즈>의 행선지는 동유럽이다. 첫 회에선 동유럽 여행을 위한 사전 모임과 여행의 기점인 베를린 한인민박집에 안착하는 장면까지 방영됐다. 특별히 새로운 설정은 없었지만, 누적된 팬층이 워낙 탄탄한 예능이라 첫 회부터 9.2%라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좋아하는 여행 예능들은 예전에 방문한 여행지를 다시 떠올려 주는 기특한 점이 있는데 <꽃보다 할배 리턴즈>의 베를린도 그랬다. 여행객으로나마 지나쳐 본 기억으로도 흐뭇해지는 화면을 보며, 주섬주섬 여행의 기억과 함께 오래된 사진을 꺼내 보았다.
민박집 아들내미와 이서진이 나누는 대화를 보니, 베를린이 아닌 본이 수도이던 시절의 기억을 향유하던 분들이라 독일의 통일과 관련된 장소들을 훑는 듯 보였다. 화면에 잠시 스친 체크포인트찰리 역시 기억나는 곳이다.
2005년에 베를린에 도착한 나는 그 전 일정이 겨울의 북유럽을 도느라 2주간 한국인을 못 만난 상태였다. 다른 것보다 한국말을 쓰지 못해 금단증상에 시달리다 베를린 한인민박집으로 향했다. 한국말과 한국 음식을 섭취했던 민박집에서 추천한 관광지들은 국회의사당이니, 유태인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 같은 곳들이었다. 하루를 종일 무념무상으로 휘휘 돌고 나서 베를린은 큰 도시구나하고 미련 없이 프라하로 이동했다. 그때는 베를린의 매력을 몰랐다.
11년이 지나서 다시 향한 베를린은 조금은 다른 의미였다.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하다 보니 유럽의 노마드 허브인 베를린이 눈에 띄었다. 뒤늦게 알게 된 베를린의 매력은 특별했다. 유럽 대도시 치고는 저렴한 물가로 인해 청년들이 몰려든 베를린은 문화와 예술을 선도하는 트렌디 한 도시였다. 모인 젊은 에너지들로 스타트업 커뮤니티가 형성됐고, 다양한 분야의 프리랜서 생태계는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베를린에 머무르는 동안 방문한 코워킹스페이스 <베타하우스>는 그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양한 도시에서 다녀본 코워킹스페이스와 비교해보면 최고의 시설은 아니겠지만, 커뮤니티로서의 매력은 특별했다. 수시로 이루어지는 스타트업 관련 세미나와, 모르는 이들과 교류하는 데에도 스스럼없는 분위기는 가고 싶은 코워킹스페이스로 만드는 부분이었다.
이 코워킹스페이스의 벽에 붙은 문구들은 'REMOTE WORK'란 키워드를 공유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단지 인터넷과 좌석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싶은 공간은 아닐 것이다. 베타하우스 이용 카드에 적힌 'LET'S WORK TOGETHER'의 방점은 'WORK'가 아니라 'TOGETHER'에 찍혀있을 것이다.
베를린에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가능해진 또 하나의 장점은 밋업이다. 나의 경우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항상 밋업닷컴이나 카우치서핑, 페이스북 이벤트 탭 등을 통해 모임이나 이벤트들을 찾아보는데, 베를린의 모임 문화는 놀랍다. 단순히 모임의 수가 많은 것이 아니라 모임들의 퀄리티도 역시 높았다.
베를린에서 가본 스타트업 관련 밋업은 굉장히 개방적이었다. 밋업닷컴에서 내용만 보고 무작정 참석을 클릭하고 간 밋업이었지만, 발표를 누구나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고, 후원하는 스타트업에서 맥주와 음료도 제공됐다. 꼽사리 끼어서 프리젠테이션을 들으며 맥주 한 병 얻어마셨다. 무료 모임이라면 광고로 대부분의 내용이 점철될 만도 하지만, 의외로 창업과 관련한 양질의 내용들을 들을 수 있었다. 찾고자 한다면 이런 모임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베를린은 역시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신청이 늦어 가보진 못했지만, 밋업닷컴의 'Living Room Concert' 그룹의 밋업은 정말 놓쳐서 아쉬운 밋업이었다. 25명의 인원을 엄격히 제한해 받고, 주최자의 가정집 거실에서 음악 연주를 듣고, 혹은 게스트로서 연주에 참여할 수도 있는 이벤트였다. 베를린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이런 가정집의 거실에서 밀착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모임이라면 무척이나 특별한 경험일 것 같았다. 참가비는 본인도 음악을 연주해서 재능을 공유하거나, 음료 혹은 1~2유로 정도의 도네이션으로 충분했다. 비록 필자는 가지 못했지만 이런 형태의 모임이 있다면 꼭 추천할 것이다.
평화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는 시국에 베를린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도시이다. 분단의 역사를 누구보다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을 꽃할배들이 베를린 여행에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도 사뭇 궁금하다. 역사의 틈을 넘어 현대 유럽의 큰 동력원으로 기능하고 있는 베를린이란 선례는 깊이 참조할 만한 레퍼런스이다.
분단의 역사를 딛고,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전환된 베를린은 자유와 예술, 성장을 찾는 젊은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베를린에 모여든 청춘들은 협업 생태계를 구축했다. 코웤하기 위한 공간과, 디자인과, 만남이 숲처럼 우거져 다채로운 모습을 그려냈다. 사람과 사람이 협력하여 만들어내는 도시의 모습은 여행 중 지나가던 카페의 이름이었던 'Co-Berlin'이란 네이밍이 어울리는 듯하다. 고전적인 건축물과 예술품은 아니지만 사람과 문화가 데코레이션 한 'Co-Berlin'의 매력은 사실 아직 더 느껴보고 싶은 부분이다. 현실의 벽에서 해보지 못한 베를리너의 생활을 대리만족으로라도 부추기고 싶어서 꽃할배를 핑계 삼아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서 일정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베를린에 체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