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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 finito Mar 31. 2024

연대, 마음이 반응해야지

내 마음속 ‘연대의 모양’을 쫒아서

‘연대’라고 적어놓고 몇 날 며칠을 흘려보냈는지 모른다.

연대를 의식적 차원으로 끌어와 마음에 담고 가만히 머물러 보는 일.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곤 그것으로는 부족해 검색의 범위를 넓혀보는 어떤 행위. 이렇게 나는 연대와 접속을 시작한다. 어쩌면 첫, 접촉.


연대로 가장 쉽게 검색되는 것은 사회연대, 시민연대, 노동연대 등 사회정치적 운동 관점에서의 설명이었다. 관련 글들을 읽어보면 연대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목적을 이뤄가는 방식의 하나인 듯했다. 결과 도출을 위한 임시적 공생에 가까워 보였다. 흠. 왠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뭔가 드라이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좀 더 달려들어 찾아낸 내용이 있다. 연대라는 개념은 경우에 따라 사회적 결속 및 안정, 사회적 협동, 인간 상호 간의 애착, 공동체 정신, 자선, 인류애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돼 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슬슬 내 마음속 연대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연대라는 짧은 단어를 떠올릴 때면 내게 느껴지던 이미지는 ‘온기’였다. 꽁꽁 언 손을 덥석 잡아다 풀 먹인 이불 밑 아랫목에 쏙 넣어주는 할머니의 손길 같은 것이다. 꼬리를 물고 검색해 발견한 연대의 확장된 개념 중 상호 간의 애착, 자선, 인류애에 가깝다. 사회운동적 혹은 업무적 개념의 연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연대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이런 물음을 품은 채 영화를 보러 갔다. 천만 영화, 핫한 티모시 샬라메의 영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등 화려한 라인업 가운데 나의 시선을 끌었던 영화는 <바튼 아카데미>. 연대의 향기를 맡은 것이다. 영화를 고를 때도 두 글자가 작동하는 모양이다.




영화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1970년. 오랜 역사가 엿보이는 바튼이라는 명문 고등학교가 하얀 눈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2주간의 방학을 보낼 생각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들떠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연말이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갈 데 없는 학생은 당직 교사와 남는다. 당직자는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서 미움을 받는 역사 교사 폴이다. 가능한 일찍 학교를 떠나려 부지런히 짐을 싼 앵거스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엄마와 새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고 남겨진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을 잃고 슬픔에 젖어있는 주방장 메리 또한 학교에 남는다. 이렇게 갈 곳 없는 외로운 세 사람은 텅 빈 학교에서 2주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원칙주의자 꼰대 폴과 머리는 좋으나 문제를 일으켜 몇 번의 퇴학을 당했던 자유분방한 꼴통 앵거스는 자주 삐걱거리고, 이들에게 끼니를 만들어주는 메리는 초대받아 간 파티 도중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져 주변 사람들을 당혹게 하기도 한다.


좌충우돌, 원치 않은 동거였지만 세 사람은 점차 서로를 알아간다. 그들 사이에 변화는 아픔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이해하면서 시작된다. 그 과정은 작위적인 친절로 채워져 있지 않다.

아래는 이를 뒷받침하는 영화 속 장면이다.


메리의 아픔에 대한 이해 - 메리와 폴

폴은 메리로부터 약혼 중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들이 좋은 교육을 받길 원해 바튼 아카데미에 취직했으나 대학 학자금이 없어 군에 입대한 아들까지 잃은 것이다.


앵거스의 아픔에 대한 이해 - 엥거스와 폴

크리스마스날 엥거스는 폴을 졸라 보스턴에 간다. 연휴답게 잘 즐기는가 싶더니 폴을 따돌리고 어딘가로 가려다 잡히고 결국 폴과 함께 간다. 그곳은 아빠가 있는 정신병동이다. 폴에게는 아빠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앵거스의 아픔은 그곳에 있었다.

폴은 우연히 앵거스가 항우울제를 복용 중임을 알게 된다. 사실.. 자신도 그렇다.


폴의 치부와 비밀에 대한 이해- 폴과 엥거스

폴은 몸에서는 냄새가 난다. 대사 장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앵거스는 여자를 만나지 않는 폴을 이해한다. 보스턴에서 우연히 하버드 동문을 만난 폴은 근황을 말하며 평소 바튼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깨고 허풍을 떤다. 앵거스는 이를 칼같이 지적한다. 폴은 하버드 재학 당시 논문을 표절한 부잣집 룸메이트를 대신해 뒤집어쓰고 퇴학당했다. 바튼 아카데미 설립자가 고졸인 그를 받아들였고 지금껏 바튼에 말뚝을 박고 비사회적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폴과 앵거스 단둘만의 비밀이다.


앵거스와 폴 그리고 메리 : 연대와 희생

메리가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음식을 함께 먹는 그들. 가정식을 제대로 먹어 본 적 없던 앵거스는 생소해하면서도 기뻐한다. 방학이 끝나고 앵거스의 엄마와 새아버지가 학교를 찾아온다. 엥거스가 정신병동을 찾아간 후 문제가 생겼다며 앵거스를 전학시키겠단다. 엥거스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다. 메리는 문밖에서 불안에 떨며 기다리는 엥거스에게 조용히 손을 내민다. 폴은 모든 문제를 자신이 책임 지기로 하고 평생 몸 담았던 바튼 아카데미를 떠날 결정을 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연대에 대한 나의 물음의 답을 그들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서로의 아픔 혹은 치부를 알게 되고 비밀을 공유하면서 상호 간 몰이해가 연대로 변이 해가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폴과 앵거스 사이에 날카롭게 오가던 비호감은 포용으로 바뀌었고, 과거에 사로잡혀 꽉 막힌 삶을 살아온 폴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했다. 온전한 이해로부터 전해진 온기는 삶에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해 볼 만한 시선은 대안 가족으로서의 세 사람의 모습이다. 대안 가족은 연대의 개념으로 모인 가족과 유사한 관계를 통칭한다. 가족이 없거나 혹은 가족이 없느니 못한 외로운 사람들이 만나 피 보다 더 긴밀한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연대 관점에서의 대안 가족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다뤄보면 좋을 듯하다.


'연대'와 첫 접속을 시작하면서 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용어로써의 연대보다 실제 마음이 반응하는 연대의 어떤, 모양을 쫓아보았다. 사회적 거대담론을 말하기에 앞서 개인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듣고 품는 것, 누군가를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렇게 어제 보다 조금 더 살만한 오늘이 되도록 돕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연대의 원형이다. 

이처럼 내 마음이 반응하는 연대는 인간애, 휴머니즘과 닮은 둥그런 모양이다. 둥그런 형태는 개인의 삶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씨앗과도 같다.


당신이 떠올리는 연대는 어떤 모양인가?

마음을 따라 자신만의 정의를 쫓아보는 것은 연대를 위한 최초의 준비가 아닐는지.




참, <바튼 아카데미>의 원제목은 Holdovers.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세 사람의 온기가 여운이 되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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