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의 어원은 라틴어의 ‘travail’인데 이는 ‘고생’을 뜻한다고 합니다. 최근 다녀온 경북 군위군 여행에서 이 어원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군위군에는 사유하기 위해 조성된 숲인, 사유원이라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유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마음먹으면 바로 실행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유원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이곳의 사유는 기존의 사유와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 직접 느껴 보고 싶어 군위군을 찾아갔습니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흥을 깨고 싶지 않아 일부러 공간에 대한 사전 정보는 찾지 않았습니다.
사유원의 첫인상은 평범하고 깔끔하게 조성된 수목원 같았습니다. 안내 데스크에서 사유원 내부의 건축물들과 코스에 대한 안내를 받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8월 중순의 무더운 날씨인데다 초입은 심한 오르막 길이어서 금방 옷이 땀에 젖었습니다. 길을 계속 갈수록 땀은 주룩주룩 흘러 찝찝함이 커지다가 어느 순간 체념했습니다. 옷은 젖은 대로 흉하게 둔 채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땅은 축축하고 시원했습니다. 사유원에서 가장 처음 기분 좋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생각 없이 길을 계속 걷다 드디어 첫 번째 건축물에 도착했습니다. ‘소대’라는 전망대였는데 3층 건물 정도의 높이로 길쭉하게 서있는 직육면체였습니다. 건물은 전망대라는 기능 그대로 잠망경처럼 생긴 외형이었습니다. 건물에 입장하면 좁고 어두운 원형 계단이 시작됩니다. 삼층 높이의 계단을 계속 올라가다 보면 또다시 고행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마침내 계단을 전부 올라가면 전망대의 탁 트인 시야를 보게 됩니다. 사유원에서 첫 탄성의 순간이었습니다.
소대에서 내려와 두 번째 건축물로 향할 땐 고행의 필요와 정도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건물로 향하는 길은 크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소요헌’이라는 공간에 어느새 도착했는데, 소요헌은 낮고 길면서 입구가 좁은 형태의 건물이라 방금 걸어왔던 고행길에서 건물 내부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모든 면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텅 빈 공간은 특유의 울림이 있습니다. 소라고둥에 귀를 댈 때 들리는 빨려 들어가는 듯한 울림소리입니다.
맨발에 닿는 콘크리트의 차가움과 빨려 들어가는 소리에 집중하며 좁은 복도를 걷다 보면 환희의 공간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소요헌의 콘크리트 뼈대가 프레임이 돼서 지금까지 걸어온 고행길을 보여줍니다. 소요헌은 내부에 특별한 장치가 없습니다. 군더더기가 없는 공간을 그냥 걸으면서 고행과 환희의 순간을 반복해서 느끼게 됩니다.
사유원은 약 8㎞ 정도의 트레킹 코스입니다. 이곳을 걷는 동안 단순한 작용만 계속됩니다. 긴 여정을 하다 만나게 되는 건축물을 보고 환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건축물에 맨발로 들어가 온몸으로 감각하고 건축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했을 공간 여정과 그를 통한 환희를 또 한 번 경험합니다.
여정을 통한 고통과 환희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고행길마저 경이롭고 숭고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카타르시스적입니다. 여정이 끝날 때쯤 사유원이 말하는 사유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유원의 고행길이 환희와 탄성의 순간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칼럼 서두에 말한 여행의 라틴어 어원도 공감됩니다.
요즘 사회 속에서 접하는 것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고 꾸밈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서비스와 제품에는 불필요한 기능과 디자인들이 늘어나고, 맺게 되는 관계는 소모적이고 가식적이기도 합니다. 사유원에서 만난 공간들이 특히 좋았던 것처럼 요즘은 점점 군더더기와 꾸밈없는 것들이 좋아집니다.
결국 사유원에서 어떤 ‘사유’를 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하고 쉽게 가져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듭니다.
_낭만농객 김농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