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 세 번째 이야기
또다시 하와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다. 허니문의 대명사 하와이를 ‘혼자’ 여행한다는 게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나 특이한 일인지, 블로그 연재를 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2017년 한 해의 블로그 유입 키워드를 분석해보니, ‘여자 혼자 하와이’ 혹은 ‘하와이 혼자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수많은 인기 여행지를 제치고 최상위권에 랭크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와이에 혼자 가고 싶어 하는 이가 크게 늘고 있지만, 여행지가 가진 ‘커플 여행지’나 ‘가족여행지’의 이미지 때문에 망설인다는 얘기를 주변에서도 많이 들었다.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서 혼자 하와이를 여행한 기록을《여행놀이 vol.2 하와이》라는 전자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사실 하와이는 여자 혼자서도 충분히 즐겁게 여행할 수 있다. 물론 하와이 역시 호텔과의 궁합이 여행의 질감을 크게 좌우한다. 만약 나처럼 와이키키 파크라는 호텔을 만났다면, 생각지도 않은 하와이의 매력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방금 체크인한 와이키키 파크의 디럭스룸은 바닷가 수영에는 관심 없는 나 같은 여행자가 하와이의 들뜬 공기를 조용히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방이다. 늦은 오후, 흰 창살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과 그 앞에 단아하게 놓인 나무 책상이라니. 완벽하다. 만약 누군가 하와이에서 글이라도 몇 줄 쓴다면 이 책상이어야만 한다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테라스 너머 쾌청한 하늘과 맞닿은 바다 풍경은 떠들썩한 와이키키의 고정관념과는 자못 상반되는 고요함에 가깝다. 와이키키 파크는 우리보다 하와이를 훨씬 많이 찾는 일본인이 ‘호텔계의 샤넬’로 추대하는 특급 호텔 할레쿨라니가 만든 호텔이다. 할레쿨라니가 클래식하고 품격 있는 리조트라면, 맞은편에 위치한 와이키키 파크는 젊고 현대적인 호텔이다. 무작정 깔끔하고 세련된 부티크 호텔이 아니라, 하와이 특유의 ‘바다, 서프(Surf)’로 상징되는 빈티지한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니 더 매력적이다.
사실 객실이나 부대시설로는 다른 와이키키의 호텔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이곳이 내게 강렬하게 각인된 이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혜택 때문이다. 체크인할 때 직원이 갑자기 “카드 키를 잊지 말고 가져가세요”라며 일러준다. 보통 호텔의 카드 키는 체크아웃 시에 카운터에 반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간혹 따로 요청해서 소장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카드 키를 가져가라고? 알고 보니 이곳의 카드 키는 그냥 객실 열쇠가 아니었다. 카드 키만 제시하면 하와이를 대표하는 3곳의 미술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파크 액세스(Parc Access)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신박한 호텔 서비스가 다 있나! 그래서 체크아웃할 때 키를 갖겠다고 말하면 기꺼이 내준다. 서핑 보드가 그려진 카드 디자인도 어찌나 예쁜지, 소장 욕구를 절로 자극한다. 덕분에 내 하와이 여행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한국인 여행자들은 어렵게 낸 짧은 휴가에 머나먼 하와이까지 와서 굳이 미술관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취재일정 외에는 별다른 계획도 없이 혼자 하와이에 왔고, 해변에서 서핑이나 수영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무작정 향했던 다운타운에서 멋진 로스터리 카페를 찾아내고 차이나타운의 재래시장에서 밥을 먹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특유의 문화적 매력에 흠뻑 빠졌다. 게다가 다운타운에는 하와이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모여 있다. 그중에 파크 액세스에 해당되는 호놀룰루 뮤지엄 오브 아트(Honolulu Museum of Art)로 향했다. 긴가민가했는데, 카드 키를 보여주니 $10나 하는 미술관 입장료가 진짜 무료다. 심지어 체크아 웃을 하고 간 건데도 전혀 문제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매표소에서 키를 보여주면, 입장권에 해당하는 스티커를 옷에 붙여준다. (*2018년 10월 현재 입장료는 20$로 올랐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을 첫 번째 하와이 여행 때부터 오지 않았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일단 관내에 펼쳐진 아담한 정원은 하와이가 아니라 어느 유럽의 소도시 미술관에 온 것처럼 고풍스럽고 한적했다. 책이라도 한 권 가져왔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있고 싶은 야외 테이블이 정원을 주변으로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시끌벅적한 와이키키와는 달리, 이곳엔 현지인이 대부분이고 너무나 고요했다. 멋스러운 옛 건축물과 정원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 혼자 와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꽤 많았다. 이쯤 되니, 전시 관람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우선 야외 정원에 있는 예쁜 커피 바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스 라테와 팽 오 쇼콜라(pain au chocolat)를 주문하니, 보덤(Bodum)의 심플한 컵에 라테가, 달콤씁 쓸한 초콜릿이 듬뿍 든 홈메이드 빵은 접시에 담겨 나온다. 그렇게 커피 바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만히 흘려보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커피 바 쪽에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호놀룰루 미술관에는 독특한 관람 프로그램이 있다. 미국의 부호이자 아트 컬렉터인 도리스 듀크(Doris Duke)가 자신의 사저를 이슬람 궁전처럼 꾸며놓은 일명 ‘샹그릴라’로 향하는 가이드 투어인데, 매일 전용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샹그릴라 투어 신 청자들이 버스 탑승을 기다리며 모여든 것이다. 투어 가이드에게 혹시 남는 자리가 있을지 슬쩍 물어보니, 예상대로 오늘 투어는 진즉에 매진이란다. 역시 준비 없이 찾아왔더니 아쉬움이 남는다.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다음에는 일찌감치 와이키키 파크에 예약을 해놓고 호놀룰루 아트 여행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파크 액세스로 입장할 수 있는 비숍 뮤지엄(Bishop Museum)과 스팔딩 하우스(Spalding House), 그리고 이번에 못 가본 샹그릴라 투어까지 돌다 보면 이틀쯤은 매우 바쁘게 지나갈 것 같다.
Epilogue
위 내용이 실린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출간 후 최근에 하와이를 찾았다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와이키키 파크 호텔이 리노베이션 및 리브랜딩을 위해 2018년 10월부로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당시 객실의 분위기를 좌우하던 빈티지한 분위기는, 사실 30여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쌓인 흔적이기도 했다. 노후한 호텔의 시설을 개조하는 대신, 할레쿨라니 리조트는 이 호텔의 완전한 리브랜딩을 선택했다. 이제 2019년 가을이면, 와이키키 파크는 '할레푸나(Halepun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문을 연다. 할레푸나는 '웰니스(wellness)' 프로그램과 같은 젊은 감각의 서비스를 갖추고, 지금의 감각에 맞는 호텔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위 글에 소개한 '파크 엑세스'처럼 미술관 무료 입장 서비스를 가진 호텔을 한 곳 더 찾았다. 이번 하와이에서 묵었던 '서프잭 호텔 앤 스윔 클럽(Surfjack Hotel & Swim Club)이다. 이 호텔은 조만간 본 브런치의 '여행놀이 하와이' 매거진에 따로 소개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