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다영 nonie Oct 25. 2018

고요한 휴식의 시간이 필요할 때, 카펠라 싱가포르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 두 번째 이야기

차이나타운 맛집 순례를 마치고 온 늦은 오후, 모처럼 야외 비치 베드에 누웠다. 남국의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드넓은 풀장에는 아기를 안은 쾌활한 엄마와 딸이 신나게 첨벙 대고 있다. 멍하니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다가도, 문득 혼자라는 사실에 슬그머니 허전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수영을 못하니 언제나 잠깐의 태닝과 음악 감상이 풀장 휴식의 전부다. 저 멀리 깊은 물에서 한참 놀던 모녀가 옆 베드에 자리를 잡더니, 이런저런 먹거리를 부산스럽게 꺼내 든다. 잠시 후, 엄마에게 무슨 말을 들은 꼬마 소녀가 다가오더니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아까 시내에서 사 온 건데 하나 남아서”라며 쿨하게 내민다. 유쾌하게 “Thank you”로 화답하며 받아 든 아이스크림 덕분에 무료했던 오후가 갑자기 달콤해진다. 뚜껑에는 ‘동양의 바닐라’, 판단 (Pandan) 잎이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여기는 센토사 섬 깊숙이 숨어 있는 아름다운 리조트, 카펠라다.



열대우림 깊숙이 펼쳐진, 카펠라의 드넓은 야외 수영장.


문득 처음 묵은 싱가포르 호텔이 떠오른다. 2011년 패션쇼 취재차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 MBS)에서 묵게 됐다. 막 개관하여 세상에 알려지던 시점이었는데도 57층 옥상의 수영장은 이미 물 반, 사람 반으로 엄청나게 붐비고 있었다. 대형 호텔이 부족했던 싱가포르에 건물 3채짜리 특급 호텔이 생겼으니 화제가 되는 건 당연했다. 카지노와 쇼핑 아케이드에서 흘러나온 인파를 헤치며, 하이힐을 챙겨 들고 컨벤션 센터와 객실을 오가면서 2박 3일을 보냈다. 그렇게 도시 재개발의 상징인 초고층빌딩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매 순간, 심지어 57층 수영장마저도 나를 지치고 피곤하게 했다. 7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이리저리 치이는 서울에 서의 고달픔을 이국의 호텔에서 다시 맞닥뜨릴 줄이야. 그 숙박 이후, 일로든 여행으로든 MBS에 묵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험은 호텔이 여행에 끼치는 영향력을 절감하고 새로운 호텔을 찾아다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직접 고르고 고른 부티크 호텔은 대부분 동네에 숨어 있어서, 호텔을 찾아다니며 싱가포르의 색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귀국 직후 이 여행을 책으로 엮기 위해 전자책 출판사 히치하이커를 열었고 본격적인 호텔 여행도 시작했으니, 내게 싱가포르는 호텔 탐험의 시작과도 같다. 그렇게 수많은 호텔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꿈의 호텔이 있다. 좁아터진 고층 호텔만 즐비한 싱가포르에서 무려 풀 빌라(Pool Villa)를 보유한 꿈의 리조트 ‘카펠라’다. 


싱가포르 호텔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세계적인 특급 호텔이라도 주변국에 비해 객실은 좁고 평당 객실료는 비싸다는 것이다. 이는 도심 부동산의 가격이 살인적인 홍콩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리조트의 상징인 풀 빌라는 땅이 좁은 도시국가에서는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숙박 형태인 것이다. 그러니 싱가포르에서는 도심에 리조트를 짓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카펠라 싱가포르에는 넓은 부지에 독채로 지어진 풀 빌라가 무려 38채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카펠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리조트가 인공 섬 센토사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분명 도심 내에서 해야 할 여행과 일이 있지만 충분한 휴식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어느 여행에서, 나는 벼르고 벼르던 카펠라 싱가포르에 큰 맘먹고 머무르기로 했다. 이미 조금 더 저렴한 샹그릴라 리조트(Shangri-La’s Resort)를 통해 센토사 섬의 매력을 맛본 뒤였다. 



차분한 분위기의 로비 라운지. 체크인은 이 곳이 아닌, 객실 내에서 '인룸 체크인'으로 이루어진다. 


센토사 섬에서도 중부 남쪽에 깊숙이 위치한 카펠라는 전체 부지가 워낙 넓은지라 입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비로소 로비동이 나온다. 1880년대 영국 식민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을 그대로 살려 개보수한 로비는 지난 2018년 6월 북미정상회담의 장소로 선정되면서, 세계적인 명성과 스토리까지 갖게 되었다. 또한 카펠라의 풀 빌라는 마치 휴양 리조트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침대 옆 서랍을 여니 최첨단 디지털 스크린이 나온다. 클릭 한 번으로 거실부터 욕실까지 모든 블라인드가 단계별로 여닫히고 조명까지 한 방에 조절되니, 그야말로 싱가포르의 단면을 그대로 담고 있다. 반면 거실에는 아름다운 예술품과 빈티지한 가구가 단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머물고 싶어 진다. 안쪽에 위치한 침실에서는 창 너머로 개인 수영장이 보인다. 수영장에는 지붕이 없어서 열대 소나기를 맞으며 혼자 수영하는 기분이 꽤나 상쾌하다. 


하지만 카펠라 리조트가 내 마음속에 들어온 건 단지 풀 빌라의 시설이나 열대우림이 우거진 리조트의 풍광 때문만이 아니었다. 도심에서 취재나 여행을 주로 하는 나에게 휴양지 리조트는 “언젠가는 가보고 싶지만, 아마 이번에도 안될 거야” 같은 존재였다. 보통 리조트는 바다나 자연경관을 끼고 짓기 때문에 도심과의 접근성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센토사 섬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거리감이 없다. 완벽하게 도심과 나를 차단할 필요가 없으면서도 세계 여느 휴양지에 못지않은 휴식이 가능하니, 이보다 이상적인 리조트가 있을까?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객실 밖을 나서는 순간, 죄다 비슷한 빌라동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버기(buggy)를 타고 지나던 직원의 도움으로 어쩌다 로비까지 실려 온 김에 물었다. “저, 센토사 익스프레스(Sentosa Express)를 타고 싶은데요?” 


잠시 후, 직원이 운전해주는 버기를 타고 호텔 입구까지 나와 천천히 걸으니 금세 임비아(Imbiah) 역의 간판이 보인다. 센토사 익스프레스는 센토사의 주요 지점을 도는 무료 전차다. 멀라이언 (Merlion)과 루지(luge)를 탈 수 있는 임비아 역부터 유니버설 스튜디오(워터프런트 역), 시내로 향하는 관문이자 비보시티(Vivocity)가 있는 하버프런트 역까지 손쉽게 갈 수 있다. 덕분에 순식간에 도착한 쇼핑몰 비보시티에서 마음에 드는 요리를 골라 저녁도 먹고 쇼핑도 맘껏 했다. 이미 두 손은 크고 작은 쇼핑백으로 묵직해졌지만, 걱정 없다. 비보시티 앞에 1시간에 1대씩 오는 호텔의 셔틀버스를 타면 되니 말이다. 이렇게 휴양지와 거대 도심이 하나로 묶여 있는 여행지는 굉장히 드물다. 단지 심신의 휴식만이 아니라, 도심에서 완전히 소외되거나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안도감도 또 다른 형태의 휴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문하면 즉시 요리를 시작하는 조식 메뉴 중 하나인 로티 프라타. 


오믈렛, 토스트 등의 전형적인 아침 메뉴가 실린 메뉴판에서 ‘로티 프라타(Roti Prata)’가 단박에 눈에 띈다. 로티 프라타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저렴한 현지 음식으로, 주로 아침에 밀크티와 함께 먹는다. 잠시 후, ‘이걸 시키다니 뭘 좀 아네’ 하는 눈빛을 띠며 직원이 가져온 로티 프라타는 제법 근사했다. 에어컨도 없는 호커센터에서 먹는 투박한 로티 프라타도 나름 맛있지만, 우아하게 접어서 내온 고급스러운 로티 프라타에도 싱가포르의 맛은 여전히 살아 있다. 푸르른 수영장 전경, 풍성한 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공작새 무리가 지나는 순간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꿈꾸듯 싱가포르의 아침이 흐른다. 접시를 비우고 나면 셔틀버스를 타고 부지런히 지하철역으로 갈 참이다. 오늘은 싱가포르의 맛을 찾아 차이나타운의 오래된 골목을 돌아보는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전 01화 호텔을 중심으로 테마여행을 계획하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