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 네 번째 이야기
열흘간 머물렀던 런던을 떠나, 이른 아침 베를린으로 향하는 저가 항공에 몸을 실었다. 원래 이 여행은 파리의 한 에어비앤비를 취재하기 위한 출장이었지만, 늘 그렇듯 1주일짜리 여행은 준비 과정에서 2개 도시나 살이 붙어 무려 3주짜리 장기 여행이 되고 말았다. 호기롭게 떠난 유럽이지만, 어느덧 체류일이 꽤나 흐르다 보니 한국에서 쳐내야 하는 일은 잔뜩 밀렸고 체력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 베를린 쇠네펠트(Berlin-Schönefeld) 공항에서 용케 지하철로 옮겨 탄 후 핸드폰을 열었다. 깨알만 한 글씨로 저장된 지하철 노선도를 확대해, 애써 피곤한 눈을 비벼가며 내릴 역을 확인해본다.
그런데 내려야 할 지하철역 이름이 줄로기셔 가르텐(Zoologischer Garten), 베를린 동물원 역이다. 동물원이라니? 호텔이 무슨 동물원 근처에 있나 싶긴 하지만,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잡생각은 이내 사라지고 오직 빨리 도착하고 싶은 절실함만 남았다. 오전 8시도 안 되어 런던 시내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저녁 6시고, 기내식 빼고는 먹은 것도 없다. 다행히 그때 비키니(Bikini)라는 단어가 새겨진 감각적인 표지판이 보인다. 비키니 베를린은 1950년대에 건축된 5개의 복합 단지로, 이 중 한 건물을 개조한 호텔이 바로 25 아워스 비키니 호텔이다. 호텔 자체가 옛 서독의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큰 역사적 의미가 있어서, 이 호텔에 묵는 것만으로도 베를린 역사의 한 켠에 잠시 머무는 것과 같다.
‘도시 속의 정글’을 표방한다는 호텔의 콘셉트답게 건물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 시선을 잡아끈다. 벽 전체가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호텔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향했다. 경쾌한 음악을 배경 삼아 활기차게 일하는 프런트 데스크의 젊은 직원들은 호텔리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카페나 레스토랑의 직원처럼 보였다. 당시 오픈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서비스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이었는데도, 발 빠르게 체크인을 도와주고 능숙하게 부대시설을 안내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사실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시선을 로비로 돌리면서 시작된다. 전 세계의 디자인 의자란 의자는 다 모아놓은 것 같은 로비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다들 멋진 의자와 소파에 앉아 일하는 풍경은 호텔이라기보다는 세계적인 IT업체 사무실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이곳 사진을 블로그에 처음 올렸을 때, “구글 오피스 아니냐”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지금은 전 세계 호텔에서 이렇게 개방적인 공간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현재도 한국에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가진 호텔이 없다. 시간제 멤버십으로 코워킹 카페를 운영하는 쉐라톤 디큐브시티 신도림 호텔이 흔치 않은 사례이지만, 이곳 25 아워스나 에이스(ACE) 호텔처럼 호텔 로비를 자유로운 공간으로 개방하지는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로비 라운지라는 식상한 이름은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이곳의 이름은 ‘비키니 아일랜드’다. 근처의 동물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밀림을 주요 테마로 잡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연출해놓았다. 특히 LP와 빈티지 스피커로 벽을 만들어 쌓아 놓은 공간에서는 음악을 들으며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을 만큼 한없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워크 랩(Work Labs)이라 이름 붙여진 공간에는 아이맥을 앞에 두고 공상에 빠져들 수 있는 개인 부스가 여럿 설치되어 있다. 한편 휴식 공간에는 커다란 해먹이 도시에 지친 현대인을 기다리는 비현실적인 풍경도 펼쳐진다. 나도 해먹에 한번 누워보려고 주변에서 알짱거리며 몇 분을 기다렸건만,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투숙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해먹보다 먼저 가봐야 할, 절실하게 필요한 부대시설이 있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10유로를 추가로 결제하니, 직원이 커다란 가방 꾸러미를 불쑥 내어준다. 가방을 열어보니 목욕가운과 넉넉한 양의 수건이 담겨 있었다. 가운을 입고 조심스레 복도를 지나 사우나가 있는 9층으로 향했다. 전형적인 북유럽풍의 건식 사우나는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데다 유료로 운영되어서인지 사람도 많지 않고 조용하다. 여기서 동물원의 미스터리가 조금씩 풀린다. 통유리로 설계된 사우나에 들어서니 창밖 너머로 동물원의 울창한 숲이 바라다보였던 것이다. 숲 전망과 함께 즐기는 북유럽식 사우나라니, 그동안 유럽에서 쌓인 모든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사우나를 한껏 만끽한 후, 라운지의 긴 의자에 누워 천국을 느껴본다.
사우나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고, 베를린에서 의 첫 밤이 찾아왔다. 이제 비로소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를 빠르게 쳐낼 시간이다. 집처럼 편안한 공간에서 보내는 밤을 담은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 그리고 “Almost Home”이라는 문장이 수 놓인 참한 베개와 사각사각한 침구는 당장이라도 눕고만 싶어진다. 하지만 이 객실의 숨겨진 포인트는 바로 창틀이다. 빈티지한 타자기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다리가, 오른쪽에는 파란 쿠션이 놓여 있다. 창가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라는 배려인 듯, 창가 턱의 공간이 제법 넓고 여유가 있다. 그래서 쿠션을 등지고 비스듬히 걸터앉으니, 노트북 들고 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좁은 공간은 투숙하는 내내 해먹 같은 아늑한 공간이자 일터가 되어주었다.
이 멋진 창틀 해먹에서, 그리고 로비의 진짜 해먹에서 보낸 ‘여행과 일 어딘가에 머무른’ 시간이, 나에겐 24시간 뒤의 특별한 한 시간(25 Hours)이었다. 여기서 하루 25시간을 만들고 싶은 이들이 전 세계에 참 많았는지, 수년이 흐른 2018년의 이 호텔 브랜드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까지 발을 넓히며 8개의 체인을 가진 번듯한 호텔 브랜드로 성장했다. (게다가 아코르에 인수되어 산하 브랜드가 되었다!) 왠지 잘된 자식을 보는 듯한 대견한 맘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