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적, 무슨 '여행'을 얘기하는 것일까?
종말을 걱정하는 그 '여행'은 누구의 여행인가
오늘도 어김없이 메일함에는 한 방송국에서 보내온 메일이 도착해 있다. '여행의 종말이 과연 올 건지에 대해 다루려고 하는데, 인터뷰 시간 되시냐'는 문의다.(..) 벌써 몇 번째인지. 아무리 바빠도 웬만하면 답변을 하지만, 이런 맥락 없는 질문은 식상하다 못해 이제 지친다. 저 문장에서 뜻하는 '여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주류 매체가 원하는 답변은 왠지 정해져 있는 것 같은 건 나의 기분 탓일까?
여행의 시대가 슬픈 종말을 고하려고 한다면, 기업 임직원 대상으로 여행을 강의하는 나는 올 여름에 왜 이렇게 바쁜 것일까? 물론 강의 내용은 해외에서 국내로 옮겨 갔지만, 수많은 직장인들은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올여름 어디에 묵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숨겨진 팁을 물어온다. 지난 주 한 글로벌 기업 지사에서는 전체 임직원의 절반인 90명이 내 라이브 강의를 수강했고, 무려 50명이 넘는 인원이 사전에 여행 질문을 보내오는 등 참여도가 높았다. 요즘 주말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 밀리고, 부모님께 매해 예약해 드리는 전국 휴양림은 그 어느 때보다 빈 방이 없다. 정말이지 이러한 현상과 종말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유독 매체들만 현 상황을 '종말'로 뭉뚱그리고 싶은 건 꼭 그 단어를 써야만 클릭 수를 올릴 거라 생각하거나, 아니면 과거의 '공급자' 입장에서만 현상을 바라보고 싶거나.
일단 여행의 시대가 종말이냐 아니냐를 얘기하기 전에, 행위로써의 여행과 산업으로서의 여행업은 구분해서 언급해야 한다. 현시점에서 '종말'을 고하는 대상은 전통적인 여행업이며, 행위로써의 여행은 인류의 본성과도 같은 것으로 애초에 종말을 논할 대상이 아니다. 코로나와 전혀 무관하게, 전통적인 여행업은 쇠락을 피할 수 없었다. 세계 최초의 여행사이자 유럽의 1등 여행사였던 토마스 쿡은 2019년에 파산했다. 한국의 중소 여행사들도 비슷한 시기에 줄지어 도산하면서 과거의 여행 비즈니스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코로나 이전에 현실화됐다. 그래서 책 1장의 타이틀을 '패키지 여행의 종말'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책 <여행의 미래>의 출간 시기를 2월에서 4월로 조정하면서, 출판사와 상의하여 코로나 이후의 상황은 일부러 넣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왜 이 책이 여행의 '미래'냐, 책 제목 잘못 지은 거 아니냐, 전망도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보았다. 그러나 책에서 짚은 수많은 여행의 변화는 큰 틀에서 코로나 이후에도 대부분 유효하다. 그 이유는 가변성이 높은 산업 자체보다는 밀레니얼 세대의 '여행 소비 변화'를 중심에 놓고 책을 썼기 때문이다. 이 책 이전에는 여행 소비자를 조명한 단행본조차 없었던 데다, 변변한 국내산 OTA(여행 예약 플랫폼) 하나 버티지 못하고 수많은 글로벌 서비스에 예약 시장이 잠식된 상황이 한국 여행산업의 현실이었다. 코로나 이전의 맥락을 책으로 읽고 나면, '여행의 종말이 올까?'와 같은 질문 대신 '앞으로 이런 것도 여행이 될까?'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앞서 출판사 미래의창 트렌드 레터에 기고했던 국내여행 트렌드는 아래에.
종말 대신 나타나는, 여행 소비의 새로운 변화
그렇다면 <여행의 미래>에서 짚은, 코로나 이후에도 뚜렷이 나타나는 여행 소비의 변화는 과연 무엇을 얘기하는 것일까? 위 트렌드 레터에서는 다루지 않은, 지금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기회는 누가 잡고 있는 것인지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최근 차박과 캠핑의 인기는 언택트 사회에서 불가피한 여행의 방식이기 때문이지만,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단연 새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가 선호하는 '체험'의 능동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호캉스 정보를 교환하는 해외여행 카페에는 요즘 '저 캠린이 됐어요'라는 후기가 종종 등장한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라는 소회에서는 야외라는 장소적 경험이 새로운 만족을 안겨준다는 걸 엿볼 수 있다. 한번 이런 만족을 느낀 이들은 더 이상 캠핑을 '코로나로 인한 대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캠핑 열풍의 이면에는 국내 여행의 환경적인 요인도 있다. 성수기는 모두 비슷하고, 한철 장사를 해야 하는 펜션 숙박비는 너무 높다. 합리적인 소비자들은 고무줄 가격인 풀빌라를 박당 100만 원을 주고 가느니 적당한 호텔에서 호캉스를 하거나 아예 새로운 여행 경험에 도전한다. 불합리한 국내 여행 비용이 공론화된다면, 현재 7말 8초에 집중된 국내 기업들의 여름휴가 시기가 좀 더 다양해질 거라고 본다. 문제의 근원은 한철 장사 그 자체보다는 한철 장사를 하게 만드는 초성수기의 집중 때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또한 한국은 세계 10대 여행 소비국에 꼽힐 정도로(2018년 기준 세계 9위), 나라 규모나 인구수에 비해 해외여행에서 쓰는 돈의 비중이 대단히 큰 나라다. 이 얘기는 이미 해외여행의 매력과 장점을 잘 아는 소비자 계층이 매우 탄탄하다는 의미다. 그 수요의 억압된 욕구를 가볍게 읽고 '앞으로 여행의 매력도가 떨어지지 않겠느냐, 이제 여행 잘 안 가지 않겠느냐'라고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된다. (해외여행 쪽 변화는 따로 써보기로) 기존 해외여행 마니아들은 어쩔 수 없이 국내여행을 가더라도 만족 기준을 해외여행으로 두고, 그래서 더 불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1박에 50~100만 원이나 하는데도 청소도 제대로 안된 성수기의 '무늬만 풀빌라'를 경험해 보면, 예전에는 이 돈으로 동남아에서 몇 박을 했는데라는 한탄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낮은 가성비가 차박이나 캠핑처럼 해외여행과의 비교군에서 벗어난 아웃도어 레저로 옮겨가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본다.
그런데 여행에서 체험이 대세가 되고,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억압되면서 나타난 흥미로운 변화가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익스피디아 계열과 같은 글로벌 OTA가 한국의 해외여행 산업을 점령하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가장 빠르게 국내여행 시장에 대응한 업체는 해외 OTA도 아니고 업계 1위 하나투어도 아닌, 토종기업 마이리얼트립이다. 기존의 '투어/액티비티' 플랫폼 특유의 장점을 기반으로, 국내여행에서도 핵심은 '체험'이라는 것을 빠르게 간파하고 관련 여행상품을 불과 몇 달만에 2천 개 이상 유치했다. 이들이 판매하는 '여행'은 전통적인 공급자들이 소개하고 판매했던 여행과는 확연히 다르다. 해녀들의 삶이 담긴 연극을 감상하며 해녀들이 갓 잡은 신선한 해산물을 맛보는 제주의 소셜 다이닝, 어쿠스틱 연주 밴드와 함께 떠나는 음악 여행 등은 해외에서도 하기 어려운 희소성 높은 경험이다.
더 나아가 인스타 검색으로 정보를 획득하는 Z세대는 특정 플랫폼조차 이용하지 않고 더 희귀한 경험을 개별적으로 찾아서 예약한다. 여행 준비를 따로 하지 않고, 남들 하는 뻔한 체험도 스킵하고, 자신이 머무는 로컬 숙소에서 직접 디자인한 체험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한다. 한 마디로 "인스타 공지와 네이버 예약의 시대"가 도래했다. 매력적인 경험 콘텐츠가 있다면 뭐든 판매할 수 있다. 나 역시 SNS만 뒤져서 플랫폼에 입점되지 않은 전국의 특별한 체험 프로그램을 20개 이상 찾아내어 북마크해 두었다.(이들은 다 개별 예약을 받고 있다) 이미 기존의 여행이 범주화하기 어려운 경험이 '여행'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되려 플랫폼은 소비자를 어떻게 우리 서비스로 오게 만들지, 브랜드 충성도를 강화할지를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여행 소비의 패턴이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종말'한다는 그 여행은 대체 언제 적 무슨 여행을 대변하는 것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
김다영 | nonie 강사 소개 홈페이지
- 책 <여행의 미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스마트한 여행의 조건> 저자
- 현 여행 교육 회사 '히치하이커' 대표
- 한국과학기술인력개발원 등 100여개 기업 출강, 2019년 Best Teaching Award 수상
지난 10년간 전 세계를 돌며 여행산업의 변화를 여행으로 직접 탐구하고, 가장 나다운 직업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기업 임직원의 스마트한 여행을 책임지는 강사로, 여행업계에서는 호텔 칼럼니스트와 여행 트렌드 분석가로 일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을 좀더 '나답게' 찾아가는 과정을 돕고 싶다.
인스타그램 @noni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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