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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영 nonie May 11. 2021

여행과 힐링에 돈을 써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워라밸 프레임을 벗어나면 보이는 것들


# Case 1. 긴장감이 높은 조직생활자의, 힐링

몇 년 전 S전자 임직원 특강을 하러 수원 디지털시티에 간 적이 있다. 익히 듣긴 했지만 방문 절차가 남의 나라 입국 절차보다 삼엄하다. 사전 교육 이수는 물론, 스마트폰 촬영 차단 어플을 설치하고 몇 차례의 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가까스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담당자와 만나 커피 타임으로 한 숨 돌렸다.


이 곳이 첫 직장이자 입사 7년차라는 그녀는, 휴가 철마다 뉴욕으로 간단다. 유럽이나 휴양지도 가봤지만 자꾸 뉴욕으로 되돌아가게 된다고 했다. 특별한 추억이나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이나 관심사와도 연관이 없으며 관광도 안하고 쉰다고 했다. 왜 뉴욕만 가게 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른다고 했다. 코치로서의 직업병인지,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같은 곳만 가는 이유가 내심 궁금해졌다. 그 순간 그녀의 핸드폰에 붙은, 반짝거리는 스티커에 눈길이 갔다.


"붙어있는 게 뭐예요?"

"아(한숨), 보안 스티커예요. 이걸 계속 새로 붙여야만 내부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요, 이 절차가 인사고과에 반영될 정도로 중요해요"


매일 자신의 보안 상태를 검열하는, 높은 긴장감을 가진 조직생활자에게 뉴욕은 어떤 여행지였을까? 뉴욕은 내 존재가 특별하지 않은, 엄청나게 다양한 인종과 언어가 공존하는 도시다. 누군가에게는 복잡한 대도시인 뉴욕은, 누군가에게는 '완벽한 익명성'을 보장해 주는 힐링 여행지가 된다.


하지만 목적이나 방향성 없는 힐링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 이는 여행이라기보다 정신적인 '도피처'(고급스러운 단어로는 케렌시아)로 기능할 확률이 높다. 뉴욕행의 이유를 더는 묻지 않고 일어났다. 강의장으로 나를 안내하던 길, 그녀는 복도에서 만나는 모든 직원과 쉴 틈 없이 인사를 했다.





# Case 2. 공허함의 원인을 찾지 못한, 전문직 종사자와 여행

누구나 부러워하는 전문직군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가끔 코칭을 받으러 온다. 몇 년 전 찾아온 그녀 역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독립적인 사업장까지 마련한,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였다.


그녀는 성장 과정에서 무엇을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고, 눈앞에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부모와 주변의 인정을 받는 직업을 선택한 것일 뿐, 삶의 방향성과 연관시켜 진지하게 바라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말을 몇 차례나 반복했다.

"취향을 가진 강사님이 특이한 거에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저같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요"


그러다 생애 첫 유럽 여행에서 충격과 자극을 받고, 인생 전반의 방향을 뒤늦게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좀더 의미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막연한 고민이 커졌고, '현재 직업이 내 삶을 억압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다. 결국 잠시 일을 쉬겠다는 결심을 한 후 나를 찾아온 것이다.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삶의 태도가 극적으로 바뀐 이유는 여행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스스로 계획한 여행을 수행하면서 '자기효능감'을 얻은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뜻하는데, 이를 직업 같은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발적 행위(여행)를 통해 발견했다. 동시에 자기 탐색을 미룬 채 타인의 인정 속에서만 살아온 스스로의 존재를, 뒤늦게 마주한 것이기도 하다.





'워라밸' 프레임에서 빠져 나오기

책 <손으로, 생각하기> 저자 매튜 크로포드는 자아의 실현을 일(노동)로 이룰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정신적 만족을 여가에서 따로 찾게 된다고 분석한다. 생계와 생활이 연계되지 않을수록, 내면의 균열이 커진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보대출 중개인은 타인의 돈을 '등쳐먹는' 일이 그의 인간성과 공동체를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일과 여가에서의 자아를 분리한다. 중개인은 휴가로 떠난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새롭게 충전된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인간다움이나 삶의 방향성이 없는 채로 일을 지속할 때, 또는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일(회사)의 방향이 다를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허함을 느낀다. 누구나 인정해주는 전문직을 가진 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화이트칼라 시대의 몰락과 여행(여가) 산업의 급성장은 반비례 곡선으로 한 궤에 있다고 본다. 


일과 여가를 단절시키는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은, 철저하게 기업 관점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프레임이다. 책 <일을 잘한다는 것>에는 일과 삶을 대등한 관계로 놓는 워라밸의 어감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등장한다. 삶이 일을 포괄하는 훨씬 큰 개념인데, 은근슬쩍 일을 부각시키는 뉘앙스를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기업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주 5일제와 워라밸(당근)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긴 몇 년간, 여행은 여가의 중심이었다.(나같은 기업 강사가 엄청나게 바빠진 이유이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 여행의 빈자리엔? 명상, 걷기, 글쓰기 챌린지같은 켸켸 묵은 힐링 산업이 '나를 찾고 싶은' 소비자를 파고들며 마음챙김이라는 신종 산업으로 재등장했다. 힐링과 마인드풀이 나를 찾아 준다면, 힐링이 현실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에서 도망쳐 나와 다른 도시로 가거나 '힐링'에 돈을 쓰는 일은, 눈앞의 문제를 회피하는 데는 충실한 역할을 한다. 반면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기까지, 점점 더 긴 시간이 걸린다. 워라밸의 틀에서는 왜 일요일 저녁만 되면 한숨이 나오는지, 왜 여행과 명상에 아무리 돈을 써도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는지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워크와 라이프를 나란히 놓은 구조에서는 '나'의 존재와 고민이 빠져있다.


일과 여가를 분리하는 워라밸을 넘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아가는 능동적 여가의 방법을 함께 상상해보면 어떨까?

케이스 1의 직장인이 커피를 좋아하는 이였다고 가정해보자. 뉴욕을 재방문할 때마다 커피를 탐색하는 과정을 기록했다면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케이스 2의 전문직 종사자가 나를 탐색하는 작업을 여행보다 먼저 했었더라면, 여행에서는 자아 발견을 넘어 새로운 분야의 열정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현실 세계에서 완전한 자유를 느낀 시점은 일과 여가를 분리하지 않게 된 시점, 즉 자아실현과 생계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면서부터였다. 원하는 삶의 방향이나 모양새를 정하고 나니, 여행의 목적도 온전한 나를 완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접근할 수 있었다. 작년에 열었던 프립 독서모임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만드는 여행의 기술'의 취지도 이 지점에서 얻은 노하우를 공유하고자 했다. 그러고보니 새로운 독서모임도 얼른 만들어 좋은 분들을 모셔야겠다. 다시 재개될 여행의 시대를 앞두고, 같이 읽어볼 새로운 책이 꽤 많아졌다.







김다영 | nonie 강사 소개 홈페이지 

- 책 <여행의 미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스마트한 여행의 조건> 저자

- 현 여행 교육 회사 '히치하이커' 대표

- 한국과학기술인력개발원 등 100여개 기업 출강, 2019년 Best Teaching Award 수상


지난 10년간 전 세계를 돌며 여행산업의 변화를 여행으로 직접 탐구하고, 가장 나다운 직업을 만들었다. 일반 기업에서는 임직원의 스마트한 여행을 책임지는 강사로, 여행업계에서는 산업 칼럼니스트와 트렌드 분석가로 일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을 '나답게' 찾아가는 과정을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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