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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K Oct 12. 2020

네가 말로만 듣던 구아바로구나

나홀로 히말라야에(4) ABC 트레킹 Day2

산의 시간은 도시의 시간보다 일찍 시작되어 일찍 마감된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인명 피해가 발생할 확률이 현저히 높아지기 때문이다. 트레킹 기간만큼은 나도 산사람이 되어 산의 시간을 따라 새벽같이 눈을 뜬다. 저 멀리에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눈 덮인 산의 한 꼭지가 보인다. 아직 새벽 어스름을 못 떨쳐 낸 채 우뚝 솟은 그 모습이 외롭고, 멋지다.



첫 날 묵은 숙소에서 새벽밥으로 토스트를 먹고 떠날 채비를 한다. 짐을 꾸리다 배낭에 달린 호루라기를 보며 잠시 엄마 생각에 잠긴다. 히말라야에 갈 것이라는 통보에 별다른 내색은 안 하셨지만 내심 걱정이 됐는지 출발 전날 조용히 건네주셨던 호루라기. 이제 보니 보라색이 참 예쁘다. 엄마 덕에 산에 갈 때는 늘 호루라기를 달고 다닌다. 수호신 같은 존재랄까. 나만의 수호신을 오른쪽 가슴팍에 대롱대롱 매단 채로 둘째 날의 여정을 시작한다. 오늘은 그 이름도 귀여운 Bamboo까지 오른다. 해발 2,310m.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보다 높이 올라가는 대망의 날이다.



출발하여 두 시간쯤 걸었을까, 가이드가 잠시 쉬자고 이야기한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배낭을 내려놓는데 가이드가 무언가를 건넨다. What is this? Guava. 구와봐…? 그게 뭔데…? 아 혹시 티비 속에서 망고를 유혹하던 그 구아바? 테니스 공 마냥 야무지게도 동그랗다. 일단 한 번 잡숴봐의 표정으로 나를 보는 가이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한 입 마구 베어 문다. 입 안 가득 향긋한 과즙이 퍼진다. 와, 생각보다 너무 맛있다. 감탄의 증표로 베어 문 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네가 말로만 듣던 구아바로구나. 꽤 맛있는걸? 산행 중에는 중간중간 에너지를 보충할 행동식이 중요한데, 히말라야의 구아바라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부스터다.


이 구아바 이후로 수많은 구아바를 시도해보았지만 그때의 맛을 도저히 느껴볼 수 없어서 슬프다.




우리나라는 외국인이 와보고는 계단의 나라라고 혀를 내두를 만큼 계단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계단의 민족에게는 산길도 예외는 없다. 한국의 웬만한 산에만 가봐도 데크로, 돌로 계단길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계단지옥이 없는 산을 찾아보는 게 오히려 힘든 편인 것 같다. 히말라야에도 이런 지옥의 계단 구간이 있는데,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Chomrong. 듣기로는 3,000 여단의 계단이라던데 직접 오르고 내려보니 칸 수를 헤아릴 만한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저 걷고, 걷고, 오르고 또 오른다. 중간중간 만난 ABC 이정표와 귀여운 강아지, 톡 쏘는 탄산음료에 힘을 얻어본다.



무념무상에 잠긴 혹독한 7시간의 산행 끝에 목적지인 Bamboo 롯지에 도착한다. 다리에 엄청난 근육통을 느끼며 저녁으로 피자를 먹는다. 무언가 자극적인 음식이 간절히 필요하다. 히말라야의 피자는 어떤 맛일지 순전히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해발 3천 미터를 넘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날이다. 점점 높아지는 고도에 나의 순환계가 잘 적응하길 기도하며 기절하듯 잠에 든다. 이상하다, 다리는 아픈데 마음은 평안하네. 이런 느낌 썩 나쁘지 않다.




2020년 10월 흐린 가을날

구아바의 맛을 떠올리며 K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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