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으로 세수하고 스노우볼을 굴려보자
버스를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버스의 정거와 출발에 관성의 힘을 받는 불가항력적인 순간을 싫어한다. 늦은 밤 한산한 버스의 뒷좌석에서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건 참 좋지만, 인생살이가 으레 그렇듯 그런 순간들은 흔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좋은 음악에, 시원한 밤공기에, 관성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그 뒷좌석에 앉아 천천히 지나가는 가로등의 주황빛을 즐길 수 있는 기회 말이다.
통근을 위해 대개 지하철을 이용한다. 운 좋게도 회사며 집이며 모두 역세권이다. 소극적 재테크의 일환으로 지하철 정기권을 이용한다. 합리적인 금액의 이 정액권은 한 번 충전할 때마다 30일간 60회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니 지하철만 이용하는 내게는 일명 개이득이다. 명절이 다가오기 전 타이밍 좋게도 이용기간이 만료된 터라 연휴의 끝자락에 역사로 가서 바지런히 충전을 한다. 투입구로 야무지게도 빨려 들어가는 만 원짜리들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며 돈 쓰기 참 쉽네, 새삼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연휴의 마지막 날에는 새벽 산행을 했다. 전날 충전한 정기권을 찍으며 개찰구를 지날 때 무심코 바라본 손바닥만 한 화면 속 만기일에 눈길이 간다.
만기일 : 11월 2일
11월…? 두 눈을 의심하려다 이내 깨닫는다. 그래, 달이 한껏 차오르는 동안 시월이 되어버렸고 이 정기권을 매일같이 소진하여 다시 충전해야 할 그 날이 오면 십일월이 되는 거야. 혼잣말에 도가 트니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정상을 향해 숨을 고르며 데크 계단을 오르다 옆을 바라본다. 넓고 옅게 깔린 구름의 틈 사이를 비집고 빛이 쪼개져 들어온다. 흔들림 같은 건 모른다는 듯 곧은 모습으로 산란하며 모두를 비춘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건가? 실버라이닝. 진종일 흐릴 것만 같더니 떠오르는 태양에 하늘이 반짝 맑아진다. 파란 하늘 위에 제멋대로 흩어져있는 짙은 구름들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흐려도 맑은 하늘이 다 있네. 가을이긴 가을인가 봐.
무의식으로 행하는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나를 일깨우는 것들이 있다. 아직은 낯선 개찰구 디스플레이 속 '11월'이라든지, 우수수 떨어져 아스팔트 위에 볼품없이 짓눌려 버린 은행나무 열매의 흔적 같은 것들 말이다.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흘렀다며 나를 다그치는 것 같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시간은 물러서는 법이 없다. 그저 밀물처럼 한없이 밀려오기만 한다. 내가 흑마법사쯤 된다면 달의 힘을 빌어 바닷물을 당겨내 썰물의 시간을 조금 더 벌어볼 텐데.
버스의 급정거와 급출발에 몸을 가눌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잔뜩 힘을 주어 중심을 잡으면 꾸역꾸역 잡히는 것처럼 지금의 내겐 관성이 필요한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스노우볼을 굴려 플레에 가고 싶다'던 <실버판테온> 속 장범준의 간절한 노랫말처럼 뭐라도 굴려보자. 결과는 아무래도 좋다. 실패도 성공도 흐르는 시간 속에 과정이 될 뿐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흠. 처지에 '이왕'같은 부사를 붙여봐도 될지 잘 모르겠다. 바라건대 12월의 마지막 주에는 함께 있으면 마음 편한 누군가와 시원하게 소주 한 잔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0년 10월의 첫 월요일
결심과 실행이 필요한 K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