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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K Sep 15. 2020

ABC는 초콜릿 이름이 아니야

나홀로 히말라야에(1) 생각을 멈추고 발을 디딜 곳으로

나에게 2017년은 전쟁과 같은 한 해였다. 그 해에 나는 업보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일명 '워라밸'이 좋다고 평판이 자자한 이 놈의 회사 구석에서 나는 왜 항상 밥 먹듯 야근을 하는가? 이건 다 업보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아니 근데, 전생에 내 주변에는 어째 악행을 저지를 때 경찰을 불러 줄 의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단 말인가? Radiohead의 <Karma Police>를 즐겨 듣던 중학생의 내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톰 요크나 조니 그린우드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인생 상담을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싶어 지는 나날들이었달까.


물 한 잔도 제대로 챙겨 마시지 못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격무에 시달리는 날들로 가득했던 한 해의 끝자락에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아니, 내가 인생의 변곡점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1월 중순에 나는 1주일 간의 휴가를 선언하고 ABC로 떠났다.


ABC는 회사 탕비실에 널려있던 초콜릿의 이름도, 노랗고 빨간 간판의 신발가게 이름도, 아메리카 대륙의 방송국 이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줄임말이었다. 그렇다. 나는 낯선 땅의 해발 4,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한 꼭지에 올라가 보기로 결심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ABC 정상 초입의 안내판 - 실제로 마주하면 눈물 나게 반갑다.




입사한 지 햇수로 5년째, 어느 영역에서나 즉전감이었던 20대 후반의 흔한 회사원이었던 내게 '등산'은 곧 진절머리와도 같았다. 주말의 나는 침대에 누워 부디 이 중력이 나의 피로를 다 끌어당겨 가버리길 바라며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가만히 누워있느라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던 내게 산을 오른다는 것은 의지를 기반으로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의 행위가 아니었다. 가장 최근 등산의 기억이라고는 새해맞이 시산제라며 신입사원 시절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에서 끌려간 도봉산 산행이었는데, 살얼음 낀 산길을 아이젠 없이 기어 내려오느라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뿐 즐거운 기억은 전혀 없었다. 뒤풀이 끝에 고기와 술냄새를 풍기며 1호선에 몸을 실었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어쩐지 급격하게 울고 싶어 졌던 기억만이 강렬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번아웃의 위기를 마주하기 직전의 나는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SOS를 보내기 시작했다. 있잖아, 나 지금 사는 게 너무 힘든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 친구1 :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너 여행스케치 모르냐? 술이나 마시자. (소맥 콸콸콸…)

- 나 : 우리가 여행스케치 세대는 아니잖아 나의 소중한 친구야? 술 좀 그만 말아줄래?


- 친구2 : 휴직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네가 그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부서를 옮기거나 업무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해보는 건 어때?

- 나 : 오 그래 그런 방법이 있긴 하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행이 힘든 상황임. 왜냐고? 아… 그건 말이지… 뫄뫄가 봐봐해서 솨솨하잖아? 그럼 내가 와와해서 어쩌고 저쩌고… (결국 안된다는 얘기)


- 친구3 : 넌 지금 정신수련이 필요한 듯. 운동 꾸준히 했고 혼자서 뭐든 잘하니까 히말라야 트레킹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때? 너 휴가도 많다며. 나 OO이랑 인도 여행 갔을 때 네팔로 넘어가서 히말라야 다녀왔었잖아. 되게 괜찮았어. 너 의외로 좋아할걸?

- 나 : 뭐? 어딜 가라고? 네팔?

- 친구3 : 응. 네팔. 왜 그 닥터 스트레인지가 교통사고 당하고 나서 틸다 스윈튼 찾아가서 수련하다 득도하고 타임 스톤 얻은 곳 있잖아. 카트만두가 수도인 그 나라.



와우. 마블의 팬도 아닌 나는(하지만 영화광이다) 남루한 몰골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상당히 간절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헤매던 장면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았다. 오… 거기가 네팔이란 말이지? 히말라야 트레킹이 꽤 괜찮단 말이지? 나도 그곳에 가면 타임 스톤을 다루게 된 닥터처럼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팔을 휘둘러 원을 그리며 타임 라인을 허물어 버리던 닥터 스트레인지를 동경하던 마음이 고개를 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친구3의 인도-네팔 여행기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카트만두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해버렸고 그것으로 나의 조금은 무모한 히말라야 산행이 시작되었다.


인천공항 T2에서 탑승권을 손에 쥐니 이 여행의 시작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2020년 9월

주말 산행이 사무치게 그리운 K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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