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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Oct 25. 2023

벤치에 앉으면 생각나는 사람들

아일랜드와 영국의 길을 걷던 날의 추억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알려진 문구다. 세상과 이별하면서 혼자 중얼거렸을 법한 말투다. 꽤나 천연덕스럽다. 인생을 달관한 자의 여유도 느껴진다. 그러나 묘비 원문을 알게 되면 느낌이 살짝 달라진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오래 살다 보면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Den elpizo tipota, Den forumai tipota, Eimai eleftheros).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망자의 비문(碑文)은 본인이 생전에 유언으로 남길 수도 있지만, 대개는 후손들이 고인의 삶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문구를 찾아 정한다. 버나드 쇼나 카잔차키스처럼 유명인들의 묘비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언젠가 맞이할 자신의 ‘그날’을 떠올리고 대비하는 마음가짐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명인들의 비문을 우연히 만날 때는 ‘나’보다는 ‘그’에 대한 상상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뀐다.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의 시골마을 벤토사를 지나면서 만났던 제임스 윈터스(1980~2009년)의 묘비도 그랬다.      

Don't grieve for me now.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요.

I'm Free. 난 자유로워요. 

If my parting had left a void, 

내 떠난 자리에 공허가 남았다면, 

Then fill it with remembered joy. 

그 공간을 즐거웠던 추억으로 채워줘요.

A friendship shared, a laugh, a kiss 

우리가 나누었던 우정과 웃음과 입맞춤

Ah yes, these things I too will miss. 

예 그래요, 나 또한 너무 그리울 것 같아요.      



30세 아까운 시절에 세상과 이별하는 남자가 남아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남기고 있다. 죽기 직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를 사랑했을까? 어떤 꿈을 가졌을까?      


아일랜드 남부 위클로우 지방의 글렌맬류어 롯지는 앞마당이 노천카페다. 야트막한 산과 강을 끼고 있어 아늑하다. 롯지 1층은 레스토랑 겸 카페이면서 2층 전체는 숙박용 객실로, 가족 전체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대부분 손님들이 실내를 마다하고 전망 좋은 노천카페에 앉아 식사하거나 음료를 마신다. 식사를 마치고 인근 전망 좋은 벤치로 옮겨 앉으면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벤치 등받이의 조그마한 동판에 쓰인 글귀 때문이다.      


In memory of Peter Gorey(1951-2001) who loved to walk these hills. 

이 마을 언덕을 즐겨 걸었던 사람, 피터 고레이를 추억하며.   


   

어두워지면 반대로 1층 실내는 시끌벅적하지만 노천카페는 조용해진다. 하얀색 건물 벽에 걸린 꽃바구니들이 가로등 불빛과 밤하늘 달빛에 어울려 주변에 운치를 더해준다. 낮에 앉았던 바로 옆 벤치에 살며시 앉으면, 누군가에게 등을 기댄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역시, 등받이에 붙은 동판의 글귀 때문이다.   

   

In memory of Brigid Brady who loved this place. Come sit with me. 

나는 브리짓 브레디, 이곳을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여기 나랑 같이 앉아요.      



영국 잉글랜드의 도보여행길 CTC를 15일간 걸어서 횡단하려는 이들은 첫날 아이리시 해변의 절벽 위로 헉헉거려 오르고 나면 잠시 숨 고르기를 한다. 기다란 벤치 하나가 너무나 반가워 얼른 배낭을 내려놓는다. 멀어지고 희미해진 세인트비스 마을 정경에 아련한 심정이 되어갈 즈음엔 의자 등받이 철판에 새겨진 몇 줄 문장에 눈길이 간다.      


In memory of our parents, Maenne & Hanna Koehner who lived in St. Bees for over 40 years. 

저희 부모님을 생각해 주세요, 매인과 한나코너 두 분, 이곳 세인트비스에 40년 넘게 사신 분들이랍니다. 



도시로 떠난 자식들이 하늘나라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세상 어디나 다 같은 모양이다.      

아이리시 해안을 떠나 십여 일쯤 지나면 노스요크무어스 국립공원으로 들어선다. 영국의 황야인 무어 지역을 걷다가 잠시 농가 주택 몇 채와 농장 몇 개가 전부인 시골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언저리에 기다란 벤치가 하나 있어 지나는 이들을 쉬어 가게 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혹시나 하고 뒤돌아본다. 역시나 벤치 등받이에 동판 하나가 붙어있다. 15년 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떤 여인의 자취가 여기 이렇게 남아 있다.      


Treasured Memories of IAN JEAL Who Loved This Area. 1944~2001 

이곳을 사랑했던 사람, 이안 질의 소중한 추억을 기리며  

    

누군가의 아내였거나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모습도 오버랩된다.      



세인트비스를 떠난 지 15일째 되는 횡단 마지막 날, 드디어 북해 바다를 만났다. 파도치는 절벽을 따라 남쪽으로 마지막 걸음을 옮긴다. 숨이 차올라 올 즈음 역시 홀연히 벤치 하나가 나타나고 역시나 등받이 기다란 동판에 글귀 두 줄이 새겨져 있다. 아무 이름도 없이 담백한 사랑의 글만 남겼다.  

    

In loving memory of our treasured mum and dad. Together again and always in our hearts. 

저희 엄마 아빠의 소중한 사랑을 기억합니다. 늘 저희들 마음속에 함께 있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배낭 내려놓고 잠시 쉬노라면 역시 얼굴 모르는 누군가의 모습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서로 얼마나 그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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