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철 Dec 30. 2023

메세타에서 길을 잃다

길을 잃었을 땐 오던 길 되돌아가 보는 게 좋다. 

마지막 만났던 이정표 까지라면 더 좋다. 

마음의 길을 잃었다면 초심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나온 길 다시 거슬러 돌아가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다. 잘못된 길인지 제대로 가는 길인지 확실치 않을 땐 더더욱 그렇다. 길 잃은 줄 알면서 계속 그대로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방법이다. 어쩌다 지구 한 바퀴 돌아 그 자리에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메세타에서 길을 잃었다. 

잃었는지 제대로인지 확실치가 않은 게 문제였다. 길가에 늘어선 전봇대처럼 꼬박꼬박 나타나 주던 이정표가 언제부턴가 안 보이게 되면서 초조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이정표가 30분 전이었는지 한 시간 전이었는지 기억이 없는 게 문제였다.      


정신줄을 놓고 걸을 때가 있다. 주변 경관에 취해 넋 잃고 걷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생각에 몰두하며 사색하듯 걷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의식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다. 걷는다기보다는 온몸이 땅 위에 떠 있는 채 뒷바람에 밀려 그저 앞으로 떠 가는 것이다. 몸체만 밀려가고 팔다리는 덜렁거리며 이끌려가는 상태, 머릿속이 한참 텅 비었던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이 들면서 걸음이 멈춰진다. 뒤돌아보면 내가 언제 저기를 지나왔나 싶게 멀고 낯선 길 위에 서 있다.    



메세타(Meseta) 고원은 그런 곳이다. 

걷는 이를 정신줄 놓게 만드는 그런 곳.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내륙 고지대에 드넓게 펼쳐져 있다. 프랑스의 생장 피드포르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 지방을 오롯이 횡단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일부 구간이다. 한 달 이상 걸리는 이 여정에서 중간 일주일 가까이를 평균 해발 700미터의 메세타고원과 함께 한다. 고원을 특징짓는 단조로움과 황량함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하고 지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악명의 구간으로 소문나 있다. 일부 유럽인들이 부르고스에서 차를 타고 레온까지 이 고원을 건너뛰는 이유이기도 하다. 쉬어갈 그늘이라곤 없다. 멀리 나무 한 그루씩 가끔 보이는 외에는 황량한 초원과 끝없는 밀밭 그리고 지평선뿐이다.     


오전엔 멀리에서나마 하나둘씩 보였던 순례자들도 오후 들어 벌써 네 시간째 종적을 감췄다. 현재의 내 위치를 알 수가 없고 오롯이 혼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으면서 슬슬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고마운 줄 모르고 지나쳐오던 노란색 이정표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냥 들이마시면 되는 공기였지만 지금은 뜨거운 사막에서 찾는 샘물이 되었다.      


어디에선가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했다. 

그게 어딘지를 기억할 수가 없으니 되돌아가 볼 엄두가 안 났다. 관성적으로 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초조해지는 만큼 걸음 속도도 빨라진다. 얼핏 배낭 속 나침반이 떠올라 황급히 멈추어 꺼내본다. 서쪽을 향해 가는 방향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나마 안심이다. 정면으로 기울어지는 태양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지평선과 해의 거리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좁아지고 있다는 것. 붉게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이 점점 두려워진다.      


오늘 숙박지로 목표했던 온타나스(Hontanas) 마을이 나타나야 할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난 듯하다. 다른 마을, 아니면 마을 비슷한 뭔가가 멀리 얼핏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온통 저물어가는 지평선뿐이다.      


오늘 밤 이 황량한 고원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텐트도 없고 아찔한 일이다. 하긴, 방한복 서너 겹 끼워 입고 에스키모처럼 중무장하여 침낭 속에 누우면, 10월의 밤 추위쯤이야 어찌 견딜 것도 같다. 한 달 순례 중 고작 하룻밤쯤 어떠랴. 메세타 밤하늘 아래서 별 헤며 잠드는 것, 얼마나 낭만적인가?      


아침에 부르고스(Burgos)를 출발한 시간으로 가늠하면 지금껏 30여 킬로미터는 걸어왔겠다. 산길도 아닌 이 평지길로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어디선가 민가 하나쯤 분명히 나올 것이다.      



LA에서 차를 몰아 15번 고속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모하비 사막을 지나며 북동쪽으로 불모지대 수백 킬로미터를 달리다 보니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황량한 지평선만 흐릿하게 보이던 차창 앞으로,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휘황 찬란 신세계가 나타났다. 완만한 오르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라스베이거스가 내리막이 시작되는 야트막한 고개 지점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두워진 사막 멀리 한가운데에 찬연한 불빛들이 일렬로 늘어선 그 정경은, 판타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신비롭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 돌발성 때문에, 저녁 무렵 이 지점을 처음 지나는 운전자들에겐 그 감동의 기억이 오래간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지평선 하늘 주변은 점차 어둑해지던 어느 순간, 메세타고원의 내 발걸음 저 아래로 반가운 불빛 몇 개가 나타났다. 오래전 모하비사막을 건너 라스베이거스 불빛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감동, 이번엔 안도였다.      


돌고 돌아 온타나스마을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마을인지 아직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평지보다 50미터 정도 낮은, 야트막한 분지 마을이었다. 방금 지나온 내리막 시작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지하 마을인 것처럼 절대 보일 수 없는 그런 위치다. 마을 입구임을 알리는 듯 큼직한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반갑고 놀랍게도 바위 각각에 노란색 화살표와 노란색 조가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지난 보름 동안 하루 수십 번씩 그리고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여러 번 만났던 반가운 그 이정표였다.     


비로소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배낭 내려놓고 주저앉아 이정표 바위에 등을 기대었다. 물병을 꺼내 마지막 아껴 뒀던 물 모금을 단숨에 들이켰다. 발아래 저 불빛들 중 어느 한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안에 왁자지껄 모여 있을 순례자들 모습이 떠오른다. 이미 다들 씻은 후일 것이고 식당에 모여 앉아 저녁과 맥주와 함께 웃고 떠들고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난 이들끼리도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정겨운 분위기이리라.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전 18화 조선시대 6대 간선도로와 코리아둘레길 (下)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