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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Dec 23. 2023

조선시대 6대 간선도로와 코리아둘레길 (上)

사람 사는 땅이라면 어디건 길은 있어 왔다. 유럽대륙의 로마 가도처럼 통치의 필요에 의해 권력의 힘으로 조성된 길도 있고, 티베트의 차마고도처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멀리 떠난 사람들의 땀방울과 발자국들로 다져지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길도 있다. 우리 한반도라고 예외겠는가?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치며 인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하나둘씩 생겨난 길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6개 주요 간선도로망으로 완성되었다. 수도 한양을 중심에 두고 방사형처럼 뻗어가며 조선 8도를 이었다. 북녘으로 둘, 동해안과 서해안으로 각각 하나씩, 그리고 남쪽으로 두 갈래의 길이 1, 2, 3, 4, 5, 6 번호까지 달고 ‘대로(大路)’란 이름까지 부여받았다.      


그 첫 번째가 중국대륙으로 향하는 한반도 지름길 의주대로다. 한양에서 개성과 평양을 지나 평안도 의주까지 이어진 길이다. 중국 사신들이 위세 부리며 오갔던 길이요, 한양을 떠난 선조 임금이 백성들의 애끓는 원성을 뒤로하며 북으로 향했던 몽진 길이었다. 40대 초반의 연암박지원이 청나라 황제 칠순 축하 사절단에 끼어 요동 벌판과 선양 그리고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인 산해관, 이어서 북경에서 몽고고원 근처인 열하까지 가고 오는 데에도 한양과 압록강 사이 의주대로를 왕복했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요동 정벌군을 이끌었던 길이기도 하다. 평양에서 출발해 압록강까지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까지 내려온 루트다. 현재의 지명으론 개성-평산-사리원-평양-안주-정주-의주를 잇는 경로다. 태조가 회군한 압록강 위화도는 신의주 바로 코앞이다.     


의주대로의 종착지인 의주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의주목 또는 의주군으로, 드넓은 하나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쪽의 신의주시와 서쪽의 의주군으로 양분되어 있다. 대륙 진출을 꾀하던 일제가 1905년 한양-의주 간 경의선 철도를 개통한 후 둘로 쪼개졌다. 당시 일본은 철로가 들어선 지역 일대를 본격 육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주’란 뜻의 ‘신의주‘로 명명했다. 의주대로가 경의선 철로로 대체되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보듯 의주대로는 한반도를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6대 간선도로 중 1번인 이유다. 도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따르면 의주대로는 ‘서북지의주일대로(西北至義州一大路)’로 표기되어 있다. ‘한양에서 서북쪽 의주로 가는 1번 길’이란 뜻이겠다.      



이어지는 2번 길은 ‘동북지경흥이대로(東北至慶興二大路)’인 경흥대로다. 의정부, 철원, 원산, 함흥을 거쳐 한반도 동북단 서수라(西水羅)까지 잇는 길이다.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서수라 지역은 지금은 나진 선봉군이 있는 라선특별시에 속하지만 옛 지명으로는 함경도 경흥(慶興)군에 속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서수라 지역은 한반도 최북단 두만강 하류에서 유일하게 러시아 대륙과 이어지는 다리가 남아 있는 지역이기에 지리적 상징성이 크다. 언젠가 통일의 날이 오면 부산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지금의 동해안 해파랑길이 옛 경흥대로를 통해서 두만강 하류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양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도 있었으니 동남지평해삼대로(東北至平海三大路)’인 평해대로다구리양평원주횡성 지나 강릉으로 그리곤 동해안을 따라 삼척 거쳐 울진군 평해까지 이어진다대관령 넘어 옛 관동지방으로 가는 길이기에 관동대로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관동팔경 중 강릉 경포대와 삼척 죽서루 그리고 울진 망양정과 월송정을 만나는 길이다. 앞서의 의주대로나 경흥대로처럼 외적 침입에 대비하거나 변방 수비 관련하여 급한 파발마들이 한양으로 오고 갈 이유도 없었고 그저 강원지역 여러 고을들을 한양과 연결하는 기본 역할에만 충실했기에 다른 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성은 떨어졌다. 광주산맥이나 백두대간 태백산맥을 넘어야 했고, 평지보다는 산악과 구릉지역도 많았다. 민초들의 발걸음도 그만큼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한양에서 동남쪽, 지금의 부산 방면으로 향하는 영남대로는 상대적으로 인적이 가장 많았다.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부산의 현 16개 구·군 중 하나인 동래가 옛날에는 행정 중심지였기에, 한양에서 용인, 충주, 대구를 지나 동래로 이어지는 4번 대로였다.     


신라시대 때부터 자연스레 점선처럼 생겨나던 길들이 삼국 통일 과정에서 북서쪽으로 점차 늘어나며 한 줄의 실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영남대로는 그 옛날 통일신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번영의 시대를 함께했던 길이고, 지리적으로는 한반도 젖줄인 한강-낙동강 라인과 인접하여 궤를 나란히 한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걸었던 길이지만, 임진왜란 때에는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왜군들에게 본의 아니게 편리한 길잡이 노릇을 해주면서 동시에 짓밟히기도 했던 길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며 서울-부산 간은 자동차 반나절 거리로 짧아졌다. 그 옛날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들이 괴나리봇짐에 짚신발로 보름을 걸었던 그 길은 요즘은 KTX로 세 시간이면 닿는다.      


우리 한반도 동북단이 경흥대로 종착지인 두만강 하류 서수라 마을이라면, 이와 대칭을 이루는 서남단은 해남 땅끝마을일 것이다. 서울 남대문 앞에서 경기, 충청 지역을 지나 전남 해남까지 이어졌던 조선시대 옛길이 삼남대로다. 포괄적으로는 다시 제주까지 가는 바닷길까지 합쳐서 삼남길로 불리기도 한다. 때문에 총거리로는 경흥대로가 가장 길지만, 제주까지 뱃길로 가는 일정을 감안하면 시간적으로는 삼남길이 가장 오래 걸리는 길이었다.      


충청경상전라를 일컫는 삼남 지방의 풍부한 농수산품들이 이 길을 통해 한양으로 오갔고이순신 장군이 전라 좌수영으로 부임해 갈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또한 다산초당의 정약용이나 흑산도 정약전 또는 제주로 갔던 우암 송시열이나 추사 김정희 등 남도로 향하는 숱한 유배인들이 이 길을 따라가며 인생무상을 곱씹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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