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전시를 보고
떡매 같은 걸로 나를 부숴 주십시오.
아니면 바위처럼 우뚝 서 있어 주십시오.
유리처럼 얼어붙은 내 갈피를 산산이 부숴야겠습니다.
꽃잎 같은 나비 같은 희한한 것들이 부서져 나르면
그 밑에 이름 알 수 없는 꽃들이 소란히 피어나고
철철 꽃물이 흘러 고이는 가슴 모양으로 있어야겠습니다.
떡매 같은 걸로 나를 부숴 주십시오.
아니면 바위처럼 우뚝 서 있어 주십시오.
제일 좋기야 따뜻한 당신의 가슴입니다만
화가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0년, 서울대 미대 3학년 재학 중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중학교 동급생 120명 중 절반이 죽었다 “ 평안도 사투리가 강하게 남은 노화가의 조용한 목소리에는 잊어버리기 어려운 슬픔이 남아 있다.
한국 전쟁 당시 경찰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내려온 김창열은 경찰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초기 그림은 경찰 잡지 표지로 남아 있는데 나는 이때의 그림이 좋다.
휴전 후, 김창열은 본격 화가의 길을 걷는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회화의 단순함 속에 침묵하는 비감이 어려있다.
정통 회화와 추상 사이의 깊고 넓은 스펙트럼 그 어딘가에서 1955년, 김창열은 해바라기를 그렸다. 해바라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자체로 직관적인 비유이다. 그래서 진부할 법 하지만 너무나 뚜렷하게 상징적이어서 지루할 수도, 지겨울 수도 없다.
김창열의 해바라기 또한 그렇다. 태양을 향하게 창조된, 수평으로 놓인 단순한 선으로써의 해바라기는 어디를 향했을까
1960년대 중반 김환기의 도움으로 김창열은 뉴욕에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일생을 전부 알 수도, 또는 그 파편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화풍의 변화를 통해 김창열은 뉴욕에서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 물론 그의 말도 그러하다.
- 1965년부터 몇 년 동안 그는 일정한 두께와 길이의 선을 쌓아 올린 제사 연작과 평면 색상으로 이루어진 작품 연작을 그렸다. 로스코를 연상케 하는 불특정 한 색상을 쌓아 올린 그림들은 불편함과 함께 묘한 따스함을 지닌다.
- 김창열은 고향과는 비교해 볼 수도 없는 그 거대하고 복잡한, 기회의 땅 뉴욕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좌절했다 - ”악몽 같은 날들“, 그 말만큼이나 이 시기 김창열의 팝아트적 작품들은 그가 추구한 맥락에서 derailed 된 것처럼 보이며, 완전히 해체된 듯 보인다.
- 그토록 괴로웠던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 김창열 남은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물방울의 초기 컨셉이 태동한 것은 아이러니일 수 있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함께 있으나 함께하지 않는 구형의 패턴들.
모두에게는 악몽 같은 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1970년대, 김창열은 파리에서 그의 예술의 정점을 이룬다. 파리의 작은 아파트, 잠 못 이루던 밤, 물 잔에 남은 물을 스케치한 종이에 뿌리니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 물방울의 탄생에 대한 김창열의 말
- 물방울은 그가 겪은 그 모든 고통과 좌절을 잊어버리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물로써 지우는 것” - 전쟁에서 죽어간 동무들의 모습은 그의 평생에 남아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물방울을 집착에 가까운 정신적 강박으로 그려 왔다. 내 모든 꿈, 고통, 불안의 소멸. 어떻게든 이를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며
- 김창열은 노년에 접어들며 물방울에 외적 변화를 주게 된다. 산골 선비 집안에 태어나 천자문을 배웠던 기억과 중년을 지나며 자리 잡게 된 서양에서 접하게 된 알파벳. 활자와 물방울을 결합한 그림들을 바라보며 설마 노화가는 소재가 떨어진 것일까라며 불손한 생각을 했다. 그리다 그리다 못해 무리한 것인가
- 그러나 습하고 우울한 날씨 속을 헤엄치듯 걸으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자도, 알파벳도, 그리고 그것들을 덮은 물방울은 노화가가 물방울로 지우고자 했던, 그 일생의 슬픔을 돌아보는 순간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전시의 마지막 골목에 다다르면 그의 다큐를 짧게 볼 수 있다. 20분 남짓 뚫어지라 화면을 바라보면 마음에 깊이 남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말의 일부를 빌려 보면- 목석같은 마음에도 두드리는 게 있다. 마치 김창열 그가 말한 대로 “떡매”로 산산이 부서지듯
+ 김창열 전시를 보며 마크 로스코가 떠오른다.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의 예술이 그의 일생을 통해 해석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창열의 작품을 돌아보며,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일생은 그 사람이 창조해 내는 그 모든 결과물의 전부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 예술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 그 답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몇 명이 이런 얘길 했다-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이 몇 년째인데, 한 번 가보지 않고 디자인을, 예술에 대해 얘기한다면 주제파악 해야 한다고- 현대 예술의 본질을 보여주는 강력한 한 방이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호불호라기보다는 내 정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무료로 전시를 볼 수 있다. 한국 현대 예술전도 같이 볼 수 있다. 예술은 이토록 가깝게, 그러나 거리를 유지한 채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