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준과 독고민, 최인훈 전집 1권 <광장/구운몽>
작가 최인훈이 62년에 펴낸 소설 『구운몽』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굴레들의 허위와 허무를 낱낱이 벗겨내고 있다는 점에서 60년대 소설을 뛰어넘는 고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유·무형의 폭력을 이처럼 상징적으로 고발한 소설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간판장이 독고민은 어느 날 거리에서 큰 봉변을 당하기 시작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여러 떼의 무리들이 나타나(그의 의지와는 아랑곳없이) 그를 사장·애인·혁명군 수령·지도자 등으로 숭배하며 들러붙는다. 어디를 가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만나야만 하는 독고민은 점차 자신이 서야 할 현실의 땅이 한치도 보이지 않음을 자각한다. 굴레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한 것이다.
최후까지 믿고 싶었던 자신의 「존재」 역시 싫든 좋든 타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운명 지워졌음을 느끼는 순간 그 같은 허탈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를 죽음으로 떠밀고 만다. 그러나 그는 죽음조차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교황의 사절 독고민 대주교는 순교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이처럼 남용되어 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몽유병자 특유의 심리상태를 이용,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의 비현실적 행각을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 결과 바깥무리들의 집요한 「폭력」과 한 순수한 청년의 미약한 「저항」이 코믹한 대조를 이루면서『구운몽』은 한 개인의 허물어짐을 싫증 나지 않게 보여준다.
독고민의 혼란은 흡사 몽유병자의 그것과도 같은 4·19, 5·16등 혁명기의 혼란함을 대변하는 것이나 나아가 집단폭력에 의해 파멸되고 마는 현대인의 본질을 섬뜩하게 상징하고 있다. 자칫 산만해질 수도 있었던 이 소설이 응축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작가가 「집단에 대항하는 개인의 우선권」을 줄기차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백중성 <서울 관악구 신림2동·학생>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97251
1987년 4월 29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백중성 선생님의 구운몽 후기이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렀으니 백중성 선생님은 50대 후반에서 60대가 되었으리란 짐작이다. 백중성 선생님의 완벽한 독후감을 접하게 된 것은 행운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1960년, 구운몽은 1962년 발표되었다. 두 작품을 함께 묶은 소설집은 1976년 8월, 문학과지성사에서 <최인훈 전집 1권>으로 출간하였다 (구글 참조).
나는 책을 읽을 때 ‘몇 판, 몇 쇄, 발행일’을 기록해 둔다. 십여 년이 넘은 습관이다. 초판에 대한 집착 같은 건 아니다. 다만 내가 본 활자의 기록을 다시 나의 활자 기록으로 남기며 그 흔적을 빠짐없이 이어가겠다는 알량한 이유일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최인훈 소설집 – 광장/구운몽>은 1996년 1월 15일 발행된 초판 9쇄 본이다. 이 책의 서두에 실린 최인훈의 서문들은 <광장>의 출간판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그 변화의 흔적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
책을 다 읽은 지 한 달이 되어가지만, 나는 거의 매일 이명준과 독고민을 생각했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날, 거품으로 사라진 인어공주처럼 깊고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명준, 그리고 그 무엇인가에 쫓기고 또 쫓기다가 결국 환상 속으로 사라진 독고민.
2025년 10월을 살아가는 나에게 그들은 무엇이 되어 줄까.
최인훈의 <광장>은 그의 작품 전체를 통틀어 역작으로 꼽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진부한 표현을 빌려보자면, “불멸의 고전.” 불멸과 고전이라는 말이 차고 넘치게 쓰여 그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이지만, 닳고 닳은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그 본질을 이어오는 작품들이 있다. 이청준의 작품이 그러하고, 최인훈의 작품이 그렇다.
최인훈 광장/구운몽 소설집은, 그해 어느 날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쯤 되는 아파트 상가 초입의 ‘반딧불 서점’에서 엄마가 사준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책을 사주는 엄마의 습관은, 이해력이 조금 부족했던 자녀들을 생각하면 꽤 사치스러운 기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몇 권의 해외 고전도 함께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채워진 500쪽에 육박하는 고전 명작들이었다.
읽긴 다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알아먹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고 빠져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때의 나도, 고차원의 정신을 가진 엄마도 그 차이를 몰랐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책장에 꽂혀 있다가, 단 하나의 이유로 나는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첫 페이지부터 ‘우와’ 싶다.
책은 <광장>에 대한 최인훈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다른 소설 <구운몽> 마냥, 어느 순간 슬쩍 드러나는 두 편의 소설은 출간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련되고 감각적이며 깊은 사유를 품고 있다. 그 의미가 세월을 지나도 닳아버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학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동시에, 이런 세련된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이 주는 일종의 희열에 더해 약간의 허세까지 불러일으킨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처음엔 제목을 보고 최인훈이 김만중의 구운몽을 재해석해 책 말미에 덧붙인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는, 맞다. 김만중의 작품을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표현과 지향점은 김만중의 구운몽과 분명 다르지만, 제목에서 상상되는 맥락은 수백 년을 건너 새롭게 해석되었다. (김만중의 구운몽을 학창 시절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광장이나 구운몽이나 줄거리는 구글에 물어보면 바로 찾아 주기 때문에 내가 구구절절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라는 건 사실 핑계다. 최인훈의 세련된 문체로 구현된 이념과 젊은이의 고통과 비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선택되어야만 하는 그들의 운명을 짧고 강렬하게 요약하기엔 내 능력치가 모자라다.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 <넥서스>를 두 번에 걸쳐 읽으며 한 가지 생각을 했다 - 이념은 죽었고 종교는 살아남았다.
<광장>은 대립된 이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이명준이,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를 만나지만 결국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선택되어야만 하는 운명 속에서 그 존재를 잃고 스스로도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이야기다. (앞서 내 능력치의 한계를 얘기했지만,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나에게 두 가지 물음을 남겼다.
-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의 선택은 무엇이며 그 선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개인들의 합이 만들어 낸 '이념'이란 결국 허구의 산물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지난 세기의 낡은 이념들은 왜 지금까지도 망령처럼 인간사의 골목골목을 떠돌고 있는가
물음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구운몽>이 적힌 누렇고 바래진 페이지를 약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었다. 그리고 바로 깨닫는다 - 괜히 두근거렸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를 읽는 마냥 벙찐 기분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겨우겨우 그 맥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자신의 소설집에서 언어를 신나게 해체하고 조합하며 ‘그’ 문화를 비아냥거렸다면, 최인훈은 비슷한 맥락에서 조금은 슬픈 방식으로 해체와 조합을 반복하며 ‘그’ 시대를 풍자하고, 그 시대 속 개인의 운명을 정의한다.
<광장>에서 이념에 휩쓸려 사라진 이명준은, <구운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들에 의해 추앙받고 동시에 쫓기는 독고민으로 환생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선택되어진 삶' 속에서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슬픈 운명이 그려진다.
자신의 삶의 주체를 ‘나’로 정의하며 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명준과 독고민. 최인훈은 그런 인물들을 앞세워, 그 수동성 속에서도 실버라이닝처럼 한 줄기 빛을 비춘다. 그 빛은 사라질 때도 있지만 결국 그들의 삶에 남아 다음 세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실낱같은 희망이 된다.
이명준에게는 은혜가, 독고민에게는 숙이 그 희망이었다.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랑했을까?"
남자는 그 물음에도 여전히 대답이 없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여자도 선다. 남자가 두 손으로 여자의 팔을 잡는다.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신기한 보물을 유심히 사랑스럽게 즐기듯.
"깡통. 말이라고 해? 끔찍한 소릴? 부지런히 사랑했을 거야. 미치도록. 그 밖에 뭘 할 수 있었겠어."
구운몽의 마지막, 한 연인의 대화는 최인훈이 믿고자 했던, 그리고 끝내 믿고 싶었던 그 희망을 말하고 있다.
+ 다시 한번, 이처럼 세련되고 감각적이면서도 그 핵심을 놓치지 않는 소설이 우리 문학에 존재한다는 것에 감개무량하다.
+ 앞서도 얘기했지만 문학은 시대를 초월해야 한다. 시대상을 그리되, 시대를 초월하여 절망이든, 우울이든, 기쁨이든, 행복이든,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사유를 그려내야만 하는 것이 문학의 운명이다.
+ 소설집을 읽으며 무라카미 하루키와 다카하시 겐이치로를 자주 떠올렸다. 최인훈은 그들보다 한참 연장자이며 그의 소설들은 그들의 소설보다 한참 전에 발표되었다. (그냥 꼭 이 내용을 남기고 싶었다)
+ 책의 마지막에 문학평론가 김현의 해설이 담겨 있다. '사랑의 재확인'이란 제목이다. 해설을 읽으면 그가 왜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꼽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그래서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슬픈 감정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며, 그의 해설 자체가 감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