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어느 집>, 박찬용
이를테면 한창 미래를 고민하면서 거리를 걷고 있던 2021년 여름 나는 내 인생의 변기를 만나게 된다.
사람마다 좋아한다는 것의 정의가 다른 건 당연하다. 미련한 나에게 '좋아함'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나는 필요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고 싶던 걸 하며 살았다.
인생의 변기를 만난 부분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너무 웃었고, '좋아함'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일로 정의한 부분에서는 한참을 생각했다.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향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박찬용 작가의 새 책이 나왔다. <서울의 어느 집>, 줄거리는.... 검색해 보시라.
왜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
분명 무언가를 느꼈는데, 정리되지 못한 채 머릿속을 떠돌다 잊힌 생각들.
그러다 어느 날, 잊혀진 그것을 누군가가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문장을 마주할 때의 쾌감과 안도감.
박찬용 작가의 다른 책들처럼, 이번 <서울의 어느 집>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지금 교보문고에서는 기술/공학으로, 알라딘에서는 예술/대중문화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책은…… 코미디로 분류되었어야 한다. 이틀 동안 읽으며 몇 번이나 “예상치 못하게” 웃었는지 모르겠다. 문자 그대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며 웃었다.
읽은 책에서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은 아이폰 메모장에 남겨두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의 경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며 웃은 부분은 특별히 빨갛게 표시해 두었다. 다시 봐도 여전히 웃기는군.
앞에서도 썼지만, 이 책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다. ‘어디로 튈지’에는 여러 의미를 포함한다. 진중하다가도 불현듯 웃기고, 또 그 반대이기도 하며, 어느샌가 진심에 집중하다가도 다음 순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며 웃어버릴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아니, 집 고치는데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다.
집을 고쳐 살거나 새로 지어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 모든 집에는 나름대로 괴로운 사정이 깃들어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에 빗대어 봤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집 고치는데 이렇게까지 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지.
아름다움과 편리함, 즐거움, 그리고 ‘좋아함’의 기호와 기준에 대한 저자가 드러내는 뚜렷한 생각을 ‘뭐 이렇게까지 하나’라고 말한다면, 그건 내 기호와 기준에 있어 어긋나는 일이다.
코미디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건 나 혼자 웃자고 한 얘기고요,
사실,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 (정말로 엄청나다) 고친 집이라 해도 책 한 권 분량이 나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권을 채우기 위한 글쓰기 재능 얘기가 아니다.
집을 고치다 보면 온갖 에피소드가 생기지만, 어찌 보면 그 대부분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 일 수도 있다. 게다가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니즈를 그 어느 때보다 충실히 반영한 규격과 명칭으로 무장한 오늘날의 주거 환경에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박찬용 선생님은 그가 가진 제한된 자원에서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편리함에 대한 선호와 기호를 최상으로 구현하기 위해, 집을 고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자재와 요소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벽지와 장판 대신 나무, 악성 재고로 남은 고급 타일이나 변기 그리고 세면대, 샤워부스의 철제봉, 가구, 스위치, 문고리까지 - 그래서 오래 걸린 대신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는 책으로 남았다.
그가 글로 표현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구하는 과정'에는 그 물건들이 거쳐온 역사와 사회문화적 맥락, 그리고 그것들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가 함께 녹아 있다. 결국, 그가 직접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구해야만 했던 당위성은 단순한 취향이나 집수리의 차원을 넘어, 삶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는 저자의 전작들에서도 일관된 맥락으로 찾아볼 수 있다. 매일 마주하는 음식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방을 취재한 기록인 <모던 키친>, 그리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여러 물건들의 필요와 선택의 기준에 대한 생각을 담은 <좋은 물건 고르는 법>에서도 박찬용은 항상 '삶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일관성을 보여준다.
(약간) 삐딱한 성향을 타고나서 그런지 몰라도, 남의 집 거실이나 들여다보이는 서울의 수십억 아파트에 살지 못해서 매일 부동산 가격을 갱신하는데 보태면서도, 한강 이북의 오래된 동네들에 몰려와 남의 집 담벼락에서 시끄럽게 사진 찍고 “와 여긴 건물이 낮아서 좋다”, “자연이 가까워서 좋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이런 날 싫어해도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난 이런 사람인 걸 어쩌나).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아는 분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훌륭한 인품의 작가는 (글 중에서 호전적이지 않다고 밝힌 걸 보면 인품이 훌륭할 가능성이 높다는 내 개인적인 판단)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훨씬 우아하고 품위 있게 남겨 두었다. 아래처럼.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생각은 묘하게 비슷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고, 오래된 곳이 좋고 역사가 소중하고. 그런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서촌 같은 곳에 와서 분위기를 느낀 뒤 결국 자기 구미에 맞게 고친 대형 아파트 단지나 오피스텔로 돌아가서 편안한 저녁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낭만과 합리를 모두 잡는 선택이다.
<서울의 어느 집>은 어쩌면 분류가 필요치 않은 책일 수 있다. 기술/공학 섹션과 예술/사회문화 섹션은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극과 극의 장르이다. 이 책은 기술/공학, 예술/사회문화의 맥락에 더해 저자가 집을 수리하며 느낀 감정들이 분석되고 정리되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담았다. 때문에 이 책은 그만큼 분류의 경계가 모호하며, 그 점이 이 책이 여타의 "에세이"와 차별되는 부분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멋있는 걸 만드는 건 대단한 영감이나 남다른 비밀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할 일들의 무한 반복이다. 스튜디오 식목일 팀은 창작의 비밀이 그 반복임을 아는 듯 묵묵히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계속 수평을 재고 벽에 못을 박고. 가구가 설치된 뒤에도 또 수평을 재고, 문짝을 달고, 그 일들이 계속됐다. 뉴욕에서 활동했던 그림 위조 화가 켄 페레니의 회고록 중에는 ‘나는 명작이 어떻게 나오는가 싶었는데 그냥 붓질을 계속하는 거였다.’ 같은 구절이 있다. 그 말대로였다. 일견 지루해 보이고 실제로 하는 입장에서도 지루할 일들이 반복되며 내가 원하는 것들이 구현되고 있었다.
그래서 박찬용의 글을 좋아한다. 그는 ‘좋아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모든 것에는 그의 말처럼 대가가 따르고,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는 태도 속에는 삶에 대한 정직함이 있다. 그의 글은 결국, ‘남의 집 담벼락’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고쳐 살아온 경험 위에서 세워진 문장들이다.
이대로는 좀 아쉬우니, 읽다 웃음이 터져 갈비뼈가 금 가는 줄 알았던 문장 하나를 더 남긴다. (실제로 근육통 왔음)
창문을 열고 샤워를 시작한 지 며칠 지났을 때 공포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평소와 다름없이 콧노래라도 부를 법한 기분으로 샤워를 마치고 나가는 길. 창문 밖에서 "다 보여!"라는, 장년층 여성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랄 수밖에. 나는 반사적으로 화장실 밖으로 뛰어 몸을 숨겼다. 옆집 창이 우리 집 욕실창과 가까운 건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보일 만큼 가까운 모양이었다.
이 문장만 보면 ‘뭐, 그런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기회가 되면 꼭 <서울의 어느 집>을 읽어 보면 좋겠다. 아주 많이, 예상치 못하게 웃게 될 것이다.
+ 언제나처럼 책의 내용에 대한 해석은 나의 해석일 뿐이다. 과해도, 덜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