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는 말, 이청준
과연 진실은 존재하는가, 아니 실체적 진실이 중요한가. 말이 인간으로 인해 그 태초의 약속을 배반한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면. 구원에 대한 인간의 꿈과 희망을 다시 파괴하면서까지 가난한 현실로 우리를 귀환시키는 것이 과연 소설의 정당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강한욱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당시의 이청준이 스스로 감당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고민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이청준 전집 9: 다시 태어나는 말>의 말미에는 강동호의 해설이 실려 있다. 위 문장은 그 해설의 한 대목으로, 이청준이 평생 붙들고 헤매 온 ‘말’의 의미에 대한 답 같으면서도 답이 아니다.
70년대 ‘말’에 굴복하는 현대인의 좌절, 혹은 자신의 좌절을 소문 속 소문으로 고백하던 이청준은 80년대에 이르러, 말의 의미를 다시 더듬어 찾는 과정에서 그 좌절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건넨다. - 이건 나의 말일 뿐이지만.
<다시 태어나는 말>은 책 안에 실린 작품들뿐 아니라, 그 밖에서 서로 이어져 있는 이청준의 문학 세계 전체를 자연스럽게 호명한다. 이청준이 평생 다루어 온 숙제들은 작품 간의 연대를 통해 이 책에서 빛을 발한다.
여기 실린 중단편들은 대부분 1980년대 초반에 쓰인 작품들이다.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할 수 없었던 말들과 이야기들은, 약간의 환상이 버무려진 현실의 형태로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진다.
몇 개의 인상적인 이야기들만 추려보자면......
<새와 나무>, 이 책의 첫 작품이다.
“그건 일부러 지은 관계가 아니었다. 자리가 저절로 만들어낸 관계였다. 분명한 자리는 부러 관계를 만들지 않아도 저절로 그것 속에 들어서 있었다. 서로의 자리가 분명하지 않으면 만남도 관계도 있을 수 없었다. “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제작되며 두 개의 (내 생각에)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빠졌는데, 그중의 하나는 호빗의 여정 초반에 등장하는 톰 봄바딜과의 만남이다. 절대반지를 끼고도 사라지지 않는, 반지의 절대적 위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인물에 프로도는 놀란다. 그에게 톰의 아내는 얘기한다 - 톰은 모든 것들의 주인이자, 그 자신의 주인이라고.
<새와 나무>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그 어떤 관계도 억지로 만들지 않음으로써 나무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의 자리를 만들고, 빗물에 젖어 지쳐버린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비워줄 수 있는 자리의 주인. 그 자신의 주인.
이어지는 단편묶음 <새를 위한 악보>는 세 가지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치질에 대한 기묘한 철학, 학습된 웃음과 슬픔의 해학, 그리고 쌓고 또 쌓은 끝에 결국 그들만의 성城에 갇히게 된 인물들의 이야기 - 1980년에 쓰인 이야기들은 45년이 지난 오늘의 세태를 정확히 비추고 있다. 시대를 한참 앞서본, 선지자적인 면모와, 한국식 토속 위트로 감싼 씁쓸함은 이청준 특유의 문학적 서명이라 할 수 있다.
<조만득 씨>는 자연스럽게 이청준의 초기작 <퇴원>이나 대표작 <소문의 벽>을 떠올리게 한다. 한 인물이 있다. 그는 정신이 나간 듯, 또 아닌 듯한—그 경계에 놓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오려는, 즉 현실인 듯 비현실인 듯한 세계에 억지로라도 발을 붙이게 하려는 ‘권위’를 가진 존재가 등장한다.
결국 그 ‘권위’의 주체는 그 인물을 현실로 끌어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성공 직후 고백한다. 그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혹은 그것이 최선이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고. 다만 그가 할 수 있었던 ‘나의 최선’이었다고.
이청준은 작품마다 다양한 인물을 통해, 권력이 존재하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지는—권력에 저항하는 자와 순응하는 자 사이의—비극적인 ‘밀당’을 집요하게 그려왔다. <조만득 씨>는 그 특유의 세계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가위 잠꼬대>는 <소문의 벽>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품고 있다. 1971년에 발표된 <소문의 벽>에서 작가는, 말하려 할수록 오히려 말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소문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한 개인의 좌절을 그려냈다.
그러나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다시 태어나는 말>의 세계에서 한 가닥 가능성을 제시한다. <가위 잠꼬대> 속에는 소문이라는 장막 한가운데에서도 미세하게 움트는 ‘말의 씨앗’이 있다. 완전한 말하기가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도, 말은 그 자체의 온전함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는 희망.
이 중편은 말 그대로 한 문장, 한 대목도 버릴 "말"이 없다. 버릴 말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 비할 데 없는 명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청준 전집 9의 제목이자 이 묶음의 핵심 단편이기도 한 <다시 태어나는 말>은 이청준 문학의 정수가 자연스럽게 응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가 평생 고민했던 "말 때문에 비극적 운명을 살아가게 된 범인凡人들이, 다시 말의 힘을 통해 어떻게 그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지, 말속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전한다.
이청준을 떠올릴 때면, 나는 종종 비범함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평범함과 비범함, 그 둘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비범하다는 것은 과연 무얼까.
어린 시절 즐겨봤던 미국드라마 밀레니엄 시즌2의 한 에피소드에는 마녀가 나온다. 그녀는 한 청년을 볼모로 잡고 괴롭히며 그에게 말한다 "평범하다는 것을 꺠닫는 것이야 말로 비범한 거야". 그 순간 배경으로 흐르던 폴 모리아 악단의 love is blue를 나는 지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장면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아, 평범함과 비범함에 대해 틈틈이 떠올리게 만든다.
이청준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나약함과 비겁함, 비범하게 살아보고자 했지만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범인들의 이야기를 또는 그 자신의 이야기를 수많은 말과 글을 통해 끝없이 전하고자 했다. 말 때문에 침묵하고, 말을 통해 다시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을 평생을 통해 추적한 그야말로 어쩌면 비범했던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