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팝니다>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꽤 오래전, 이제는 연락을 하지 않는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인도 여행을 추천한 적이 있다. 무질서와 무법이 일상처럼 느껴지는 동네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다 그 기차에 올라타면, 사람들 사이에 겹겹이 끼어 앉아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인생 최고의 여행이었다며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며, 그러니 나도 꼭 한 번 인도를 가보라고 거듭 말했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2010년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도 주인공은 번잡한 뉴욕에서 일과 사랑에 지친 끝에 로마로 떠나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마음껏 먹고 즐기며 숨을 돌린 뒤, 인도로 넘어가 명상과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리에서 사랑을 만나 비로소 행복한 삶을 이어간다.
이쯤 되면 흥미로운 생각들이 떠오르며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도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여행이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그곳에서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고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평화는 왜 지금, 오늘, 여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가. 한국은, 서울은 왜 평화를 찾기에 이토록 적합하지 않은가. 정말 여행만이 답인 걸까. 그 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하필 인도가 ‘평온’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 속의 속물들을 그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속물계의 황태자 홍상수는 그의 초기작 <강원도의 힘>을 통해 "강원도에 가도 아무런 힘이 없다"를 얘기한 바 있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그 어딘가를 찾아 떠나고 또 떠난다 한들 아무런 힘도 없음을 알게 되면서도 나를 찾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 현대 속물들의 모습을 그려낸 <혁명을 팝니다> The rebel sell는 북미에서는 2004년, 국내에서는 2006년 번역되어 출간된 논픽션이다.
삐딱하고 빈정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한 장 한 장 그냥 넘기기 아쉬울 정도로 현대 속물들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나는 삐딱하고 빈정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 책을 처음 봤던 2006년에도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이 전하는 바에 더할 나위 없이 공감한다.
하지만 나이키를 향한 적의가 이따금씩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창출하기도 했다. 1999년 유명한 시애틀 폭동 기간 중, 시내 중심가의 나이키타운이 시위자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현장에서 촬영한 비디오에 시위자 여러 명이 나이키 신발을 신고 앞 유리문을 발로 차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나이키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이키 신발을 절대 신지 않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스쳤다!) 하지만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나이키를 거부한다면 또다시 '대안' 신발을 위한 확실한 시장이 생긴다. 반스와 에어워크는 스케이트보딩과 연관된 저항 스타일을 지렛대로 하여 수백만 달러의 스니커즈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책의 맨 앞쪽에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책 표지의 문구와 함께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함축한다.
약간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예로 든다면 조금 더 와닿을 수도 있겠다. 한참 No Japan 운동이 왕성하던 시기가 있었다. 2019년이 그랬고, 코로나를 지나며 약간 시들해지다가 몇 년 전 또 잠깐 반짝하며 "안가요, 안사요, 안봐요" 하며 노노재팬을 외치던 분들이 있었고, 친하게 지내던 분들 중에도 "일본 가면 안 되지, 일본 물건 쓰면 안 되지"라며 목청을 높이곤 했었다.
그리고 엔화가치가 떨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일본으로 떠나는 한국 여행객수가 최다를 찍었다는 뉴스가 연일 이어졌다. 노노재팬을 외치던 내 주위 분들도 도쿄로, 오키나와로, 오사카로 여행을 떠났고 돈키호테에서 이것저것 잔뜩 쇼핑을 하고, 뭐 필요한 거 없냐며 안부문자를 주시기도 했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세상사는 신비로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그렇지 뭐.
<혁명을 팝니다>는 나의 가벼운 관찰을 훌쩍 넘어, 역사와 철학의 영역을 오가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실천하게 된 속물들의 오랜 역사와 그 흐름을 관찰해 패턴화 한 철학자들(이를테면 부르디외)의 말을 빌려 속물들의 세계를 시원하게 파헤친다.
이 책에서는 어디에도 “속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배운 분들이라 그런지, “속물” 대신 “반문화를 추종하는 세력” 같은 품격 있는 어휘를 사용한다. 그래서 어쩌면 속물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자신들 이야기인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에서 망했다(는 게 나의 가설).
저자들은 나이키 에피소드만큼이나 흥미로운 예들을 곁들여 "대중성까지 겸비하게 된 속물화된 현대사회"를 설명한다.
20년 전에도 그랬지만, 너바나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을 분석한 내용은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20세기의 아이콘이자, 21세기가 25%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전설로 남아 있는 그는 비극적이고 낭만적으로 소비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까.
커트 코베인은 파격적인 음악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는 유명해지고 싶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명해지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를 추앙하면 추앙할수록 그는 점점 두려워졌다.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파격적이고 난해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대중은, 사람들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커트 코베인이 대중성으로부터 도망치면 칠수록 대중은 그에게 열광했고 그는 영웅이자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두려움을 넘어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1994년 4월, 그는 자신의 손으로 머리에 총을 겨눠 삶을 끝내게 된다.
커트 코베인이 커트 코베인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희생자였다. 그는 반문화(counterculture)라는 거짓 생각의 희생자였다. 그가 스스로를 '얼터너티브' 음악 산업에 종사하는 펑크 로커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레코드는 수백만 장이 팔려 나갔다. '하드코어'로 불리던 음악은, 코베인 덕에 브랜드가 바뀌어 대중들에게 '그런지'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치솟는 인기는 그에게 자부심의 원천이기보다는 끊임없는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의 문화를 팔아넘기고 '주류가 된 게 아닌가'하는 성가신 의심이 커져갔다.
속물-반문화 추종자들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는 저자들은, 이들이 비난하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야말로 사실은 반문화주의와 완벽하게 접점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반문화 추종자들이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흐름은 대략 이렇다.
대중문화 혹은 대중적인 물건 → 반문화 추종자들의 거부감 발생 → 대중적이지 않은 대체재 탐색 및 발견 → 그 ‘새로움’에 대한 추앙 → 그 대안적 새로움이 점점 이름을 알리기 시작 →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됨 → 반문화 추종자들은 다시 또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
참말로 귀족적이고 고상한 소비 취향이 아닐 수 없다. 귀족의 문화는 번쩍이고 화려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그 번쩍거리는 화려함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평민들은 귀족을 모방하며 부자가 된 듯한 삶을 꿈꾸었다(마치 왕실의 그것을 귀족들이 평생을 따라 했듯이). 산업혁명은 이 모든 욕망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또다시 대체재를 찾아 나선다. 에잇,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건 이제 지겨워. 난 단순하고 간결한 게 좋아. 그렇게 미니멀리즘은 현대사회에서 ‘대체적이고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다. 미니멀할수록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었고, 대중과의 거리를 더 벌릴 수 있었다. 물론, 멀어진 만큼 다시 가까워질 여지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취향”의 탄생이다. 십여 년 전, gusto라는 이탈리아어가 들어간 어떤 분의 블로그를 본 적이 있다. 아마 그 무렵부터 ‘취향’이라는 말이 ‘개성’을 대신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성이 넘쳐 몰개성 해진 시대가 2000년대 초반이었다면, 2010년대에 이르러 현재까지는 취향이 넘쳐나 지겨워진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취향’ 혹은 그와 비슷한 단어를 볼 때마다 몸서리가 쳐진다. 정말 그렇다. 취향 이야기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꿀밤 떄리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 시기가 지나면서 패션에는 트렌드라는 것이 사라졌다. 무슨 코어, 무슨 코어—무엇이 대세고 무엇이 졌는지 따지는 이야기 자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1997년 지방시 오트쿠튀르 컬렉션으로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해 (그들만의) 세상에 충격을 안겼던 알렉산더 맥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맥퀸은 대중적인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장난기가 넘치다 못해 폭력적이기까지 한 그의 파격적 의상들은 손이 많이 가는 ‘공예품’에 가까웠고, 그만큼 비쌌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의 옷, 그의 작품을 원했다. 그가 파격을 더할수록 (그들만의 세계에서) 대중은 더욱 열광했고, 그는 추앙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마치 커트 코베인처럼.
알렉산더 맥퀸은 2010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글의 초반에 내가 인도 여행을 추천한 친구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제3세계 여행기가 서양인들에게 왜 “자기 발견”, “자아 성찰”, 혹은 “자아 탐색”의 기회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그 맥락은 앞서 말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능하면 우리의 문화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문화가 더 좋다-에 흠뻑 빠지는 것일 터다.
저자들이 반문화를 추종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사실 단 하나다. 그들이 책에서 밝힌 것처럼, “반문화는 정치·사회·경제 체제에 어떤 실질적 도움도 주지 못하며, 일관된 비전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낭만적 사고에 불과하다.”
2004년 당시, 제3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서양인들의 목표는
기술지배적 현재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좀 더 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 의식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다.
2025년 12월 현재, 나는 왜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가.
모두가 반문화에 가담한다면 반문화 자체가 문화가 된다. 그러면 반란자들은 다시 구별되기 위해서 '새로운' 반문화를 고안해 낸다. 반문화 스타일은 대단히 배타적인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언더그라운드'로 시작한다. 특정한 상징들 특정한 브랜드 신발이나 찢어진 청바지, 마오리 문신, 바디 피어싱 등- 이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 간 의사소통의 핵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막을 잘 아는'사람들의 집단이 확대되고 상징이 점차 보편화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표지의 차별성이 침식된다.
체 게바라가 스타벅스로 들어가게 된 이유, 나이키 신발을 신고 나이키 매장을 때려 부수는 대중, 얼터너티브로 도망칠수록 반얼터너티브가 될 수밖에 없었던 코베인, 극단적인 파격성을 앞세웠던 알렉산더 매퀸 - 표지의 차별성이 침식되자 비극적 결말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혁명을 팝니다>는 방대하고, 어찌 보면 다소 산만하게 반문화 추종이 사회·정치·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하지만 책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결국 독자의 몫이기에, 나는 내 "취향"에 따라 늘 흥미롭게 느껴왔던 부분들만을 골라 이 글에 남겨두었다.
저자들의 넓은 사유와 분석의 깊이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맥락이 그들의 논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은근한 안도감이 들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구나—어쩌면 오만하고 지적인 허영에서 비롯된 안심이었겠지만
덧붙여, 아는 분이 인상 깊게 읽었다 한 <야망계급론>(The Sum of Small Things)도 함께 읽었는데, 나의 결론은 이 책은 <혁명을 팝니다>의 한층 부드러운 버전이라는 것이다. <야망계급론> 역시 부르디외와 베블런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책에서 다루는 사례들 또한 현실적이고 일상의 감각에 닿아 있어 <혁명을 팝니다>보다 훨씬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야망계급론>은 2017년 북미에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