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Stoner, 존 윌리암스
<속죄 Atonement>의 작가 이안 매큐언은 <스토너 Stoner>를 두고 “아름답다. 문학을 사랑해 온 이들에게도 이 소설은 믿기 힘든 발견이다”라고 말했다.
읽는 동안에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다 읽고 며칠이 지나서야 어렴풋이 남는 게 있어 글로 남겨둔다.
존 윌리암스의 <스토너>는 20세기가 막 시작된 미국의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우연히 문학을 접하게 된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말 그대로 흐르는 강물처럼 지켜보게 되는 소설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소설에 약하다. 약하다는 말은, 감동이 지나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읽는다거나, 문장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의 약함은 오히려 이런 류의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데 있다.
며칠에 걸쳐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이걸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 질문이 부채처럼 머리에 남아서 책을 펼칠 때마다 약간의 부담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집중은 잘 되었고 읽는 일 자체는 수월했다.
하필이면 페이스북에는 이안 매큐언의 신작 광고가 계속 올라왔다.
“<스토너>를 감동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어쩌고 저쩌고.” 나는 <스토너>를 감동 깊게 읽고 있지 못했으니, 그럼 이안 매큐언의 신작은 읽기 힘들겠군, 같은 생각을 했다.
책을 다 읽고 이틀쯤 지나서야 ‘하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자 있는 삶, 하자 있는 인생, 하자의 인생, 하자의— 하자라니. 어쩌면 조금 지나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집이 딸린 땅에서 평생을 일궈도 겨우 끼니를 해결할 만큼의 수확만 가능한 시골에서, 스토너의 부모는 그를 키웠고 그를 대학에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손톱 사이의 까만 흙과 끝내 펴지지 않은 등을 지닌 채 그 땅에 묻혔다.
스토너는 부모의 삶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삶을 따라갈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문학을 만난다. 문학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전쟁에 나갈 수 없었다. 친구들은 자원했고, 그중 한 명은 전장에서 죽는다. 자원하지 않음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스토너는 문학에 있어서는 재능과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혼에 실패하고, 대학에서는 동료 교수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언뜻 보면 불쌍산 그는 젊은 여자 강사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변하기도 하고, 새로 찾아오기도 함을 그는 마흔셋에 알게 된다. 그들은 헤어진다. 사랑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가진 모든 것을 내걸어도 그 사랑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 여기까지 하기로 해요.”
시간이 흐르고 그는 쇠약해진다. 암이다. 좋아하던 책들을 곁에 둔 채, 사랑했지만 동시에 불행을 안겨준 이디스의 곁에서 그는 죽는다.
하자의 인생.
빈농의 자식, 출세하지 못한 영문학 교수, 실패한 결혼, 술에 의존하게 된 딸, 불륜으로 남은 사랑.
불쌍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삶이다. 나름의 성취는 있었다. 다만 완벽하지 않았을 뿐이다. 완벽한 삶은 없다. 모두는 하자를 안고 산다. 하자를 고치고, 채우며 살아간다.
<스토너>가 아름다운 소설로 읽힌다면, 그것은 그렇게 살아간 한 사람의 삶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존 윌리암스는 다작을 하지 않았지만 미국 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작가다. 영향력이 있다는 것과 개인의 기호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느끼며 글을 마친다.
왜 이안 매큐언이 이 소설을 칭찬했는지 알 것 같기는 하다. 정적 한가운데, 불완전한 영혼들의 불완전하여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