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언 반스
이안 매큐언은 영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속죄 Atonement> - 분노를 유발하는 이야기.
"젊음"의 아름다움과 "질투"가 불러온 비극적 결말을 뛰어난 영상미로 담아낸 영화 <속죄>는 말 그대로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속죄의 문제는 잘못을 빈다 한들 그것을 용서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속죄하지 않은 채 스스로 삶을 끝내버린 아내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Flaubert's Parrot>은 박물지 같은 소설이다.
이안 매큐언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이전에 쓴 글이 그가 극찬했다고 알려진 〈스토너〉에 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매큐언과 줄리언 반스는 영국을 대표하는 동시대의 작가로, 그들의 글은 닮아 있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이 글은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말하고 싶다.
언어란 갈라진 주전자와 같아서 우리가 그것으로 연주하면 겨우 곰들이나 장단 맞춰 춤을 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갈망한다.
줄리언 반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에서 정의한 언어에 대한 구절을 인용한다. 책의 제목에 앵무새가 들어간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구절을 반복해 불러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소설의 맥락과 닿아 있다.
은퇴한 영국인 의사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의 단편 <순박한 마음>에 등장하는 앵무새 룰루의 박제를 찾아 프랑스를 떠돈다. 그가 왜 하필 앵무새의 박제를 좇는지는 끝내 명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딱히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다.
앵무새의 흔적을 좇는 여정은 곧 플로베르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일이 되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왜 끝까지 따라가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따라간다.
앵무새라는 단어는 어원 학적으로 그 기원을 인간에 두고 있다. 프랑스어 페로케 perroquet는 사람의 이름 피에로 Pierreot의 애칭이다.
영어 패럿(parrot)은 사람의 이름 피에르 Pierre에서 유래했다. 스페인어 페리코 perico는 사람의 이름 페드로 Pedro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점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서 인간의 말하는 능력이 한 가지 구분 요소라고 주장했다. <브라만은 앵무새를 모든 새의 위에다 놓고 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앵무새만이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아일리아누스리는 기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리니우스는 앵무새가 술에 취하면 지극히 음란하다고 기록했다. "뷔퐁"은 앵무새가 간질을 일으키기 쉬운 체질이라고 이야기한다. 플로베르도 앵무새가 이처럼 자기와 비슷한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박한 마음」을 쓰기 위해 앵무새에 대해 조사한 자료에는 앵무새의 질병 목록 통풍, 간질, 아구창과 후두암- 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마치 나의 생각을 꿰뚫어 읽고 비웃기라도 하듯, 끝내 다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쉼 없이 적어나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떠올렸다.
줄리언 반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스스로 남긴 기록과 흔적을 통해 그의 일생을 더듬어 맞춰나간다면,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조각나 흩어진 아르투로와 울리세스의 흔적을 타인의 말과 기억 속에서 끌어와 하나의 퍼즐로 다시 창조해 낸다.
주인공은 플로베르의 인생을 글로 따라가며 중간중간 자신의 아내를 회상한다. 그래서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어떤 순간에는 주인공의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순간에는 이미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버린 존재로 느껴지기도 한다.
줄거리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떠올려지며, 비유의 대상으로 소환되는 플로베르의 대표작 <보바리 부인>의 에마 보바리를, 주인공이 플로베르만큼이나 자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분석과 설명. 그리고 다시 분석, 그리고 설명. 반복과 반복.
분석은 이해하기 위함이며 설명은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함이다. 주인공은 플로베르를 분석하고 에마 보바리를 분석하며 그의 아내를 이해하고자 한다. 분석의 결과로 사실이 남는다. 그는 사실을 설명하고 또 설명함으로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한다. 또는 납득시키기 위해 애쓴다.
209.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백 년 되는 어느 외국 작가에 대해서 이해한 것보다도 더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정상인가? 책은 그녀가 이러저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그녀가 한 행동만 말한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
두 개만 남아 있다는 박제된 앵무새를 찾아다니는 일은, 한편으로는 회피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죽어버린 아내의 선택, 그녀의 과거가, 그녀의 이유가 - 아무리 곱씹어도 끝내 납득되지 않는다. 플로베르의 글을 읽고 또 읽어도, 그의 자취를 따라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녀도 이해라는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녀는 떠났다.
그래서 주인공은 앵무새를 찾아 나선다. 이미 죽어버린 플로베르의 흔적이나, 아무 말 없이 떠난 아내를 이해하려 애쓰는 일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를 찾아 마주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을까.
075. 우리가 과거를 돌아다니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스럽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남아 있는 표지판을 따라간다. 거리의 이름을 읽기는 해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주위는 온통 폐허뿐이다. 사람들은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때, 우리의 눈에 집 한 채가 보인다. 아마도 작가의 집일 것이다. 앞 쪽 벽에 문패가 걸려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프랑스 작가. 1821~1880, 이곳에 잠시 살았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글자들이 안경점의 시력 측정표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진다. 우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본다. 정말, 그렇다. 대소란 뒤에도 부서지기 쉬운 것들이 일부 남아 있다. 시계는 아직 째깍거리고 있다. 벽에 걸린 판화들은 이곳에서도 한때 예술을 감상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앵무새의 횃대가 눈길을 끈다. 우리는 앵무새를 찾는다. 앵무새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앵무새의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바싹 마른 횃대뿐이다. 그 새는 이미 날아가버렸다.
얼마 전, 존 르 카레의 명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다시 읽었다. 영화와는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스마일리에 대한 묘사와 그의 아내 앤에 관한 이야기다.
한물간 스파이 스마일리는 오랜 친구와도 같은 적, 카를라를 좇는다. 카를라는 스마일리를 좋아한다. 스마일리는 카를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마일리가 빌 헤이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자 안에는 빌 헤이든이 머물렀다면, 카를라는 스마일리의 음陰이다.
스마일리는 앤을 이해하지 못했고, 카를라는 앤을 이해했다.
영화에서 다소 아리송하고 두리뭉실하게 언급되는 앤의 존재는, 소설에서는 분명하게 기능한다 - 스마일리와 카를라
다시 읽은 책에서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를 떠올렸다. 그가 찾아 헤매던 앵무새와 함께.
106. 요즘 사람들은 당신과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당신의 일부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 당신이 무모하게 책 한 권을 쓰게 되면, 그 일로 인하여 당신의 예금 계좌, 건강 진단서, 결혼 생활 모습 등 당신의 일부는 돌이킬 수 없이 대중의 몫이 된다. 플로베르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술가란 자신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후세가 믿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교가에게 있어 죽음이 육체를 소멸시켜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면, 예술가에게 있어 죽음은 인간을 소멸시켜 작품을 작가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어쨌든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물론 그것은 자주 빗나간다.
최근에 새 책을 출간한 어떤 작가는 그가 드러나지 않는 글이야 말로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의 책에는 그가 드러나지만 그는 그렇게 얘기했다. "물론 그것은 자주 빗나간다".
그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글은 그 가치를 갖는다. 닳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그런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