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자기 진술의 역설

이청준 <소문의 벽>

by 마나스타나스

고등학생 시절, 문학 수업에서 처음 그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의 읽을 후부터 이청준은 내 일생의 숙제가 된 되었다. 어려운 단어나 화려한 수사가 없는 평범한 문장들로 구성된 그의 글을 읽어내는 일은 힘들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안도감과 함께 그 내용이 멀어진 듯했지만, 어느 순간 다시 떠오르곤 한다.


이청준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소문의 벽>은 이청준이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진술의 불가능성과 그 무게로 인한 그 자신의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197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사라진 문학잡지, 낯선 서울식 말투에서 시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지만, 단지 장치일 뿐이다. 정작 작품이 전하는 것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똑같이 유효하다. 억눌린 자기 진술은 개인의 정신을 어떻게 흔드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 소설은 거울처럼 독자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문의 벽>의 시작은 이러하다- 잡지 편집자로서 한계를 느끼는 화자는 매일 밤 술에 기대어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 날 밤, 화자는 집 앞에서 낯선 남자를 만난다. 자신을 정신병자라 여기며 하룻밤만 재워달라 하는 그 남자는 기묘했다. 자신을 정신병자라 여기는 것도, 자는 동안 꺼진 불을 밤새 다시 켜 놓는 버릇도,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말없이 사라진 것도- 모든 것이 미스터리한 그는 화자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화자의 집 근처 정신병원에 스스로 자처해 입원한 환자로 이름은 박준이다. 병원장 김원장의 얘기로 정신병자는 대체로 스스로 멀쩡하다고 믿지만 박준은 그 반대였다. 박준은 단순한 노이로제 환자에 불과했으며, 이상하게도 자신을 왜 정신병자로 여기는지 물을수록 더 완강히 숨으려 했다.


<소문의 벽>은 박준이 쓴 세 편의 소설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을 축으로 전개된다. 각기 다른 줄거리를 지닌 박준의 소설들은 그 맥락이 서로 이어지며, 그가 고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가로막혔던, 그 무엇을 향해 간다.

박준, 또는 박준일 - 화자는 그가 소설가임을, 그리고 화자의 잡지사 동료인 안 형이 그의 편집자였음을 알게 된 후 박준의 소설을 추적하며 박준을 이해하고자 한다.


박준은 발표되지 않았거나 연재가 중단된 세 편의 소설을 썼다. 첫 번째 소설은 피하고 싶은 순간마다 죽은 척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결국 그는 어느 날 그 기벽 속에 갇혀 버린다.


두 번째는 연재 도중 독자의 항의(혹은 알 수 없는 압력)로 중단된 작품이다. 한 기업 사장의 운전기사가 된 남자는 주어진 비밀을 끝까지 지키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잠식한다. 마침내 그는 ‘소문 속 수많은 눈과 귀’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해고된다.


마지막 소설은 박준의 누이를 통해 전해진 미완의 원고다.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침묵으로 대화하는 듯한 환상을 본 남자는 어느 날 정체 모를 무리에게 붙잡히며, 그 앞에서 끝없는 고백과 진술을 강요받는다. 마침내 그는 어린 시절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던 ‘전짓불의 실체’를 털어놓는다.


박준을 둘러싼 인물들은 그의 소설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없었다면 소설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고, 소설이 쓰였기에 밝혀지지 않은 실체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실존함을 증명하게 된다.


자기 진술법을 통해 박준을 치료하고자 한 김원장—박준이 진술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집요하게 자기 진술을 강요하는 김원장은 전짓불의 살아 있는 실체다.


박준의 소설 게재를 거부한 안형과 박준의 소설 연재를 중단한 R사의 인물들은 소문 속 실체다. 소문 속의 그들은 소설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소문의 벽 밖에서 자신의 말과 생각을 고백하길 원했던 박준을 소문의 벽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존재들이다. 김원장이 치료라는 명목으로 자기 진술을 강요했듯, 소문 속의 이들은 소설 속 박준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의 은밀한 내면이 소설 속에서 어떤 해법을 내놓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강요한다.


도대체 한 편의 소설에서 그처럼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보는 사람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가 둘이 될 수도 있고 셋이 될 수도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인지 모른다. 내가 박준의 소설에서 어떤 인간성의 비밀과 만나고 놀랐다면, 안 형은 또 안 형대로 그 이야기를 어떤 생존의 방정식 위에서 당위론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안 형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해석만을 지켜올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토록 남의 방법은 용납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굳이 그 안 형 앞에 박준의 소설이 내겐 이미 충분히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박준의 노이로제에 대해 “자기 진술 치료”를 지나치게 확신하던 김원장과의 대화를 마친 뒤, 화자는 곧 박준의 편집자이자 잡지사 동료인 안형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 직후의 화자의 생각은 인상적이다. 김원장과 안형, 두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확신에 가득 차” 있으며, 바로 그 확신을 바탕으로 박준에게 자기 진술을 강요할 권리를 자신들이 지녔다고 믿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청준이 박준의 글을 빌려 진술하고자 했던 바는 결국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말하는 순간 심판을 감수해야 하고, 침묵하는 순간에도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인간 존재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이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1970년대의 정치적 억압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자기 진술의 곤란”을 보편적인 문제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청준은 시대적 조건을 초월하여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파고든다.


<소문의 벽>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타인의 언어와 시선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자신을 증언하고 있는가. 진술을 강요받는 자리에서 침묵하지 않으면서도, 억눌린 자기 고백을 타인의 확신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용기가 있는가.


이청준은 소설 속에서 정치적 은유를 넘어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이해를 추구한다. 그는 개인이 겪는 고통과 완전한 진술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언어의 불완전성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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