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p de coeur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마티네의 끝에서> 요코와 마키노

by 마나스타나스

몇 년 전 여름 딱 이맘때, <마티네의 끝에서>를 읽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과 <달>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어서, 이 소설도 읽게 되었다.


요코와 마키노, 두 사람의 감정이 서서히 깊어지는 초반까지는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지만, 중반에 다다르며 화가 났다. 그 상태로 책을 덮고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책을 펼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다시는 읽지 말아야지라 마음먹었었는데, 요코와 마키노의 엇갈림처럼, 또는 다시 만나야만 했던 것처럼 나 또한 어떤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책을 다시 읽어야만 했다.


또다시 바로 그 지점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서 책을 덮을까 했지만 이번에는 참고 끝까지 읽었다. 중요한 것은 화가 난 그 부분이 아니라, 그 이후 두 주인공의 삶의 궤적과 그것이 남긴 미련 또는 그리움, 때문에 만들어지는 또 다른 삶의 궤적이었기 때문이다. 마키노가 말한 대로, 현재를 통해, 그리고 미래를 통해 과거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세 번의 만남을 가진 고레나 요코와 마키노 사토시의 5년에 걸친, 멀고도 길게 돌아온 사랑에 관한 이야기.

글 중, 요코가 얘기하는 막연한 “왜일까?”에 대한 질문은 나 또한 수천번에 걸쳐서 스스로에게 또는 저 너머의 신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시간이 흘러 질문의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난 질문을 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질문을 그 누군가에게 했다 한들, 답을 구할 수 없었을 그 허무하지만 궁극적인 질문.

마흔의 길목에서 인생의 사랑을 만나, 실로 더 깊어지지도 못한 채 그 깊은 마음만 품고 5년을 돌아온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2021년 8월에 읽고 남긴 감상. 화가 나서 아무것도 안 남긴 줄 알았더니, 역시 오늘을 통해 과거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왜일까, 왜였을까를 질문하지만 그 질문이 향하는 곳은 필연적으로 달라졌다. 아직 물어볼 용기는 없어 직접 묻지 못하지만, 나는 매일 왜일까를 질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 답이 맞을 거라 확신하면서-


안나 카레니나와 설국의 그 유명한 첫 문장들처럼, 이 책의 감상을 남기는 분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구.

처음 만났을 당시 그들은 인생길의 반 고비에 이르러 올바른 길을 잃고 있던 중이었다. 즉 마흔 살이라는 일종의 독특하고도 섬세한 불안의 나이에 접어든 참이었다. 그들의 환하고도 소란스러운 일상은 그것이 지속된다고 상상하든 지속되지 않는다고 상상하든, 어느 쪽도 그리 내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신곡』의 시구에 나오는 그대로,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지는 알 길이 없건만' 문득 깨닫고 보니 그 '컴컴한 숲 속'에 헤매 들었던 것이다.

기억해 둘 만하다- 마흔 줄에 들어선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여전히 불안하지만, 동시에 그 섬세함 탓에 그것이 불안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든다는 것을. 그러니 미리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첫눈에 반한다를 불어로는 coup de foudre 혹은 coup de coeur라 한다. 번개의 일격 혹은 심장을 향한 일격. 마흔이 되어도 그 일격 한 방에 빠져드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고미네 요코와 마키노 사토시는 불혹이 되어 이 상태에 이른다. 불혹이란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사랑은 세상일 같으면서도 세상일 아닌 듯하다.


요코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에요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요코는 고등학생이던 시절, 같은 또래의 마키노의 기타 연주에 감동받았고, 그 후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음반을 20년 가까이 들었다. 그러다 마키노의 공연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으니 요즘 말로 하면 성덕이 된 셈이다. 하지만 요코는, 그의 연주를 처음 듣던 그 순간 이미 그에게 반했던 걸 거다 - 이 주장에 내 월급의 10%를 걸어 본다.


요코와 마키노는 세 번 만났다. 도쿄에서 처음 서로를 정식으로 알게 된 날, 그리고 파리에서의 두 번의 만남. 그 세 번 중 마키노의 기억에 가장 선명히 남은 요코의 모습은, 처음 서로를 인지했던 날 택시 뒷좌석에 앉은 그녀의 옆모습이다. 이대로 헤어지기 싫은 듯 그 아쉬움 속에 눈빛만 주고받았던 그날은, 잊을법한데 잊을 수 없는, 그런 사소하지만 그 둘에게는 전부인 순간이 되었다.


그들은 왜 세 번 밖에 만날 수 없었을까. 다시 한번, 마흔이라는 나이가 주는 독특하고 섬세한 불안을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자니 두렵고, 그 자리에 머물자니 너무 아쉽다. 두려움의 근원은 40년을 살아오며 겪은 수많은 감정의 진폭과 이미 어느 정도 정돈된 삶의 패턴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가기도, 덜 가지도 못한 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다 보면, 결국 요코와 마키노처럼 시간을 한참 돌아 만나게 된다.


이승환의 앨범 중 최고라 평가받는 4집 Human에는 "다만"이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일 수도 있지 - 회피하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이 가사를 떠올린다. 과도한 이해와 서로를 향한 "지나친" 배려는 피하고 싶은 감정은 피해 가는 대신 또 다른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 또는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PTSD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요코, 이라크에서의 일과 그녀를 언니처럼 따르는 자릴라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그로 인해 약혼자 리처드와 힘겹게 이별해야 했던 요코에게 그가 겪고 있던 음악적 정체停滯를 고백할 수 없었던 마키노.


사랑하는 것과 지나친 배려는 다르다.


이 소설은 연애 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흔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각자의 고뇌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성장의 이야기다.


배려하다 지쳐 소모된 감정을 마음속 깊이 감춰두고, 결국 어쩔 수 없이 택한 ‘안전한 길’이 사실은 안전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는, 감춰둔 감정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결국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잠재적) 연인이 있다.


2025년에 읽게 된 <마티네의 끝에서>는 4년 전과 달리, 전혀 다른 의미를 나에게 남겼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를 알게 된 게 4년 전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굉장히 신선했지만 동시에 '정말 그런 사람이었네'하고 느껴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 신선함을 일종의 coup de coeur로 볼 수도 있겠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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