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첩보물 빼면 얘기할 게 없는 20세기의
2024년 12월 작성.
냉전이 없었다면 영화 산업은 망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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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방첩공무원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성장과정과 KGB에 들어가게 된 계기, 프라하의 봄과 베를린 장벽 건설을 지켜보며 깨달은 소련 공산주의의 실체, 그리하여 반역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영국 정보부의 이중첩자 생활을 택하게 된 것, 그 긴 시간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와 결국 이중첩자임이 발각되어 소련으로 송환되어 24시간 감시에 노출된 생활, 그리고 결국 가족을 남겨두고 소련을 탈출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영국 대외정보국 직원들과 우정도 아니고 협업도 아닌 애매한 관계로 오래 지내며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는 과정이나, 소련에 송환된 이후 그를 빼내기 위해 몇 년 내내 일상을 희생한 대외정부국 직원들의 헌신, 이런 부분들이 인상적이다.
심지어 대외정보국 직원 부부는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걷지도 못하는 아기를 데리고 작전에 임한다. 우정일까, 의무일까, 인류애일까.
올레크의 탈출이 가능했던 이유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공산주의 관료체제였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 빽빽하게 구성한 조직이 오히려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는 것. 그 감시조직의 한 명이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고.
나와 몇 살 차이 안 나는 올레크의 딸들이 모스크바에서 24시간 내내 감시받았던 부분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에 생각했다. 소련에서 산다는 것은 가족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이 쥐어준 자유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는 어디서 본 글귀도 같이.
영화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으나 재미없었을 것 같다. 글자로 풀어낸 박진감이나 긴박함이 영상에서는 그렇게 보일 것 같지 않다. 대단한 사건이나, 뭔가 때려 부수는 그런 류의 첩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유명하다는 이중첩자, 킴 필비에 대한 책도 썼다. 친구라는 이름의 가면으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는데 재밌게 봤다.
킴 필비는 대외정보국에 들어가기 전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외정보국에 들어가 이중첩자 생활을 했다면, 올레크는 KGB 입사 후 그들의 실체를 보며 신념을 위해 이중첩자가 되었다는 작가의 얘기.
온갖 기밀과 첩보원들 정보를 소련에 팔아넘기는 대가로 알파 로메오를 몰고 다니다가 종신형을 살게 된 올드리치 에임스의 결말도 흥미롭다. 소련과 영국과 미국의 차이점, 뭐 그런 것.
모스크바의 KGB는 이때쯤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아차렸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가까운 국경을 닫으려 하지도 않았고, 전날 저녁 핀란드까지 차를 몰고 가야 한다며 대사관 행사장을 빠져나간 영국 외교관 두 명과 고르디스키의 잠적을 서로 연결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고르디옙스키가 모스크바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거나 어딘가의 술집에서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대규모 관료 제도가 형성된 곳에서 주말은 항상 느릿느릿 흘러간다. 높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하급 관리들이 직장에 나와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란……
** 꽤 장수가 많은 책이지만 재밌게 금방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