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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쓰고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것

by 마나스타나스

이 글을 남긴 것은 올해 1월 1일이다. 내 캐리어보다 무거웠던 만엔원년의 풋볼을 일본에서 다 읽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 겨우 끝내고 고른 책이 해 뜨는 나라의 공장과 개인적인 체험. 만엔원년의 풋볼은 최근에 다시 읽었다.


만엔원년의 풋볼의 무거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이 작가의 수필은 어떨까 싶어서 빌렸는데 소설이었다. d이 책, <개인적인 체험>은 작가가 말한 대로 "청춘소설"이라 부를만하다. 개인사에 있어서의 불행이다 싶은 사건으로부터 개인은 어떻게 도피하는가, 또는 어떻게 마주하는가, 또는 어떻게 마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은 타인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인 체험>이 고통의 ‘형태’라면, <만엔원년의 풋볼>은 고통의 ‘집단적 스펙트럼’이다.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이들의 세계로 이야기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꼈다.


개인적인 체험을 읽고 떠오른 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밀란 쿤데라는 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이 난해한 책을 썼을까. 항상 의문이었다. 그런데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을 읽고 나니 쿤데라의 방식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삶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사람들은 삶을 다룰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함께 고통도 함께 다뤄야 한다.


개인적인 체험을 읽고 슬픈 것도 아니고, 안타까운 것도 아닌데 그냥 무력해졌다. 그리고 또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그의 책을 별로 안 좋아하면서도 꽤 여러 권을 읽었다. 왜일까. 아마도 매번 비슷한 감정 때문이었다. 무라카미의 주인공들은 그럴싸한 문화를 앞세워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나는 그 ‘도피의 가벼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주인공들,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쩌면 나와 비슷한 부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었다. 그의 글을 통해, 나의 어떤 우습고 유치한 모습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심과 현실을 가벼움으로 덮고 말아서 저 깊은 곳에 숨겨넣고는 깃털처럼 그 모든 것을 가볍고 우습게 치부해가며 살아가는 방식. 그건 마치 해리포터에서 보가트를 우스꽝스럽게 바꾸는 마법과도 같았다.


나는 딱 그 정도 수준이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 바로 전에 읽은 해 뜨는 나라의 공장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6년도 공장탐방기에서도 그는 여전히 벙실벙실 룸펜 흉내를 내며 한없이 가볍게 글을 끌어간다. 1그램의 무게도 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굳이 누군가 찾아서 르포타주를 쓸 것 같지 않은 공장들을 찾아서 글을 제조한 그는, 그렇다면 정말 가벼운 사람일까, 아니면 다운패딩 수백만 개만큼 무거운 사람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며칠을 보냈더니, 이래서 신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너는 평생 땅을 일구며 노동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 것이라 한 명령과 저주와 예언을 이해했다. 사람에게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불필요하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삶을 소진하는 심각한 버그가 있음을 신은 설계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설계 중에 실수한 그 버그는 노동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음을.


누군가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했지만 나는 앞으로 그의 책을 더 읽게 될 것 같다. 그의 책을 더 읽게 된 데에는 그 역할도 컸으므로. 무라카미는 정말 현실로부터 도피한 걸까. 그에게 마주해야 할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호기심의 차원에서라도 그의 책들을 더 읽어볼 것이다. 뭐라도 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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