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피할 수 없는 현실, 세련되게 도망치는 법

by 마나스타나스

과거에서 또 업어온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님의 책에 대한 글. 과거의 업로드는 여기까지(오늘은).

오늘 시작했는데 관심 보여주신 분들께, 읽어주신 분들께 매우 감사드린다.

블로그나 SNS와 달리 이상하게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겨우 등대에 도달하면 튀어나온 방파제 끝에 걸터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하늘에는 브러쉬로 그은 것 같은 가는 구름이 몇 줄기인가 흐르고 눈에 띄는 한에서 완전히 푸른색에 차 있었다. 푸른색은 끝없이 깊고, 그 깊이는 소년의 발을 자기도 모르게 떨리게 하였다. 그것은 두려움과도 같은 떨림이었다. 바다 향기도, 바람의 색도, 모든 것이 놀랄 만큼 선명하였다. 그는 시간을 두고 주위의 풍경에 조금씩 마음을 익숙하게 하면서,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지금은 깊은 바다 때문에 완전히 멀어져 버린 자기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얀 모래사장과 방파제 초록색 소나무 밭이 찌그러진 것처럼 얕게 퍼져 있었고, 그 뒤에는 푸르스름하고 검은 산줄기가 하늘을 향해서 선명하게 늘어서 있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이다. 나와 나의 친구 쥐의 이야기가 하나씩 담겨있다.


책 말미에서, 현대문학은 이 작품을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주인공들과 주변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나사가 하나씩 빠진 채 제자리를 벗어나 살아간다. 그런 어긋남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굳이 그것을 상실로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에 깔려있는 미스테리함, 또는 그럴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등장인물들에 부여된 특유의 과함은 중2병 같기도 하다. 무엇이든 해 볼 수 있으니 소설이기도 한데, 그래서 하루키가 엑셀의 순환참조 마냥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동년배에 마찬가지로 패전 후 일본인들의 삶에 대한 소설을 쓴 가즈오 이시구로와의 차이점인 것 같기도 하다.


일본의 전후 세대는 패전 이후, 승전국의 통치 아래에서 잃어버린 것들과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들 사이의 모순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괴로워했던 듯하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아니었던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공허함과 허무함을 안은 채 그 무게를 감당하며 현실을 살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물들은 언제나 피하기에 바쁘다. 세련되고 있어 보이는 취미와 생활방식을 방패 삼아, 거대한 흐름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리는 것이 당연한 듯 현실을 회피한다.

그의 책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20~30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로부터 어떻게 세련되게 도망칠 수 있는지를 멋지게 그려냈기 때문인 것 같다.

눈앞에 놓인 현실을 재즈, 미국 소설, 클래식, 패션 같은 ‘있어 보이는’ 문화 코드로 감싸 그 뒤에 숨어도 괜찮을 것 같은 일종의 비겁함—그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자 한계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양을 쫓는 모험까지 이어지는 3 연작 중 첫 번째이고, 많은 경우 첫 번째가 제일 좋은 법인데, 이 책도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로 글도 재밌게 쓰시고, 무엇보다 성실하게 작가라는 직업을 이어가는 분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꼭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을 것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감성만 앞세운 유치하고 트렌디한 작가라며 무라카미 하루키를 폄하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철없는 객기였다는 걸, 작년 어느 시점을 지나며 깨달았다. 특히, 하루를 마치 회사에 출근하듯 규칙적으로 운영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보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 같았으면, 전업 작가나 프리랜서가 되자마자 곧바로 쓰레기가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는, 멋진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 작품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는 그저 그일 뿐이다. <노르웨이의 숲>과 <양을 쫓는 모험>의 인물들처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개인적인 체험 &해 뜨는 나라의 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