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의 경계에서
이제 김효와 같은 영웅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김효 사건에 질려 이제 다시는 남의 편지 같은 걸 보아서는 안 된 다고 나무손들은 생각 할지 모른다. 하지만 군대는 여전히 배우지 않고도 아는 방법이 아니면 자기를 어떻게도 할 줄 모르는 나무손들이 얼마든지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가엾게, 어째서 그것이 김효를 성내게 했는지도 모른 채 뜻 없이 죽어간 두 희생자는 악당이 되었다.
그것을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고준은 어머니의 이번 구명운동이, 법의 관용을 기대해 볼 수조차 없게끔 하여 김효를 끝내 희생시키고 말았음에 틀림없는 거대하고 요령부득한 어떤 힘 - 거기서 고준은 개개의 인간이나 집단이 제각기 따로 의지하고 있는 개개의 진실과, 그 개개의 진실들이 불가피하게 서로 야합해서 저지른 무도한 횡포와 음모를 생각했다-의 공범이었다고는 차마 주장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읽은 이청준의 <공범>은 군대에서 총으로 동료 사병 둘을 쏴 죽인 김효 일병 사건에 대해 동료 사병 고준이 1인칭 시점에서 관찰한 내용을 3인칭 시점으로 쓴 단편이다. 그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 선인과 악인의 경계에 대한 모호함과 그 판단은 독자들 몫이다.
악당과 선인의 명확한 구분은 가능한가- 애인에게서 온 편지를 뺏어 읽은 사병 둘을 쏘아 죽인 김효는 악마인가. 그의 편지를 뺏어 읽으며 놀린 중대장과 다른 일병은 정말 악당인가. 얇은 회초리 하나로 사병들의 인격을 훼손한 강중위의 행위는 어떻게 봐야 할까. 김효에게 군생활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준 고준은 어떤 마음이었나. 살인자 김효의 구명운동에 앞장선 K여사는 선한 사람인가- 누구는 선하고 누구는 악하다는 판단을 하는 나는 선인인가, 악당인가.
특정한 사건을 주제로 삼아 누구나 그 경계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도덕과 윤리의 보편적 문제의식을 끄집어내는 것이 이청준의 소설이다.
xx고등학교 1학년 11반 49번, 그 친구는 조 씨였다. 가나다 이름순으로 번호를 붙이던 시절이다. 교실 맨 뒤쪽에 앉곤 했던 49번 친구는 교과서를 베개 삼아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일본 배우들 풍으로 눈썹을 밀고 다녀서 학생부 선생님들한테 종종 혼나기도 했다. 난 그 친구와 얘기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동창회 비슷하게 모인 적이 있다. 너네 걔 알아? 조 xx?- 응 나 걔랑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걔 자살했잖아, 투신했다던데.
49번 친구와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던 고1 때 반장이 전해준, 소식이라면 소식인 얘기였다. 49번 친구의 미니홈피 방명록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자친구로 보이는 사람의 그리움이 올라왔다.
한 커뮤니티 온라인 카페에서 사진으로만 뵙던 분을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 분이 그분이네 하며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겉도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3일 뒤에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전봇대에 차가 부딪혔는데 즉사였다고 했다.
십 년도 한참 넘은 얘기인데 가끔 이 분 생각이 저절로 떠오를 때가 있다-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 사람은 언제나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 그를 안 지 3일째에 그는 그렇게 죽었다.
최우식, 박보영 주연의 멜로무비는 무해하다. 그래서 본다고 어딘가에 적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슬픈 드라마다.
고겸의 형 고준은 스무 살에 부모를 잃고 어린 남동생을 비디오 가게에 맡긴다. 살고 싶지 않았지만 어린 남동생을 생각하며 겨우 살던 그는 큰 사고를 당하고, 동생의 지극정성 덕에 의식을 회복하고 살아난다.
“형은 왜 놀라질 않아? 사고를 당하고 의식이 깨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차에 칠 뻔했을 때도 형은 왜 놀라질 않아? 형은 마치…” 고겸의 얘기다. 고준은 놀랄 일이 없다.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재활훈련을 멈춘 고준의 심폐는 기능을 잃었고, 그는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되었다.
고2 때 서양 모델의 이름을 전부 알고 있던 한 친구는 스텔라 테넌트라는 영국의 유명 모델을 제일 좋아했다. 스텔라 테넌트는 2020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저 문장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서너 일 곱씹어봤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며칠 전 읽은 이청준의 단편에서 시작되어 이 모든 생각들이 어제 퇴근길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 내가 1분 뒤에 죽는다면 내 주변 사람들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겠지만 죽음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일임에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그들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슬프고 안타깝다는 그런 알량하고 얇은 감정의 생각은 아니다. "왜"였다. 왜였을까.
동료 병사들을 쏴 죽인 김효는 사형집행 전 “그 둘의 영혼 앞에서 사죄하겠다”라고 했다.
오늘은 내 어머니의 37주기가 되는 날이다. 나는 37년간 매일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리워했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거의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아내를 생각했을 것 같다. 열정적인 추억이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면 어머니는 우리의 에우리디케가 되어, 레이디 라자루스처럼 고집스러운 죽음에서 살아나 우리를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애도는 어머니의 생명을 단 일초도 연장하지 못했고, 어머니의 심장을 단 한 번도 더 뛰게 하지 못했고, 단 한 번도 더 숨을 몰아쉬게 하지 못했다. (헨리 43세, 클레어 35세)
퇴근길 통근버스 안에서 어젯밤 다 읽은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또 생각났다. 글자들 속에 묻어나는 쓸쓸함은 단지 쓸쓸함으로 남을 뿐이다.
헨리와 클레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만이 전부 일 것 같은 이 소설은 클레어와 헨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개인들의 이야기이다. 결국, 사랑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 모든 감정과 상황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를 잃는 감정이든 누구를 향한 질투이든 그건, 타인의 눈이나 감각으로는 절대 가늠될 수 없는, 철저히 개인의 문제이다.
+ 2011년 4월 12일,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보고 남긴 글이다.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학습된 슬픔을 억지로 전하는 것 같아 어떤 얘기를 하기도, 어떤 표정을 짓기도 너무 어렵다.
슬픔도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이청준은 그의 소설들에서 시대상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에서는 시대를 읽을 수 없다.
60년을 넘어온 글자들이 전달하는 문제의식은 2025년에도 유효하다. 이청준은 시대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던 작가다.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 태어나 마주해야 했고, 경험해야 했고, 느껴야만 했던 고통과 고뇌와 그 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희망과 사랑의 일말을 보편적 인간성의 탐색과 회복이라는 문제의식 안에 남겨놓고 그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