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와 한트케와 업다이크

읽고 남기자니 어렵고 안 남기자니 아쉽고 2

by 마나스타나스

남겨놓는 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아서 남겨본 책 본 얘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레프 톨스토이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위로 나이 차가 나는 형제가 있는 덕에 초등학생이 읽기에 버겁다 싶은 책들이 책장에 꽤 꽂혀 있었다. 책의 두께를 생각하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들고 있는 초등학생은 꽤 왜소해 보였을 것 같다. 그 두께로 인해 바라만 봐도 일종의 두려움을 안기던 이 책을 어느 날 갑자기 꺼내 읽었다. 일종의 도전과 모험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그 도전과 모험을 다시 한번 해봤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의 사랑과 구원을 깨달은 톨스토이는 이 한 권의 책에 여러 단편을 담아 그의 깨달음을 전하고자 했다. 그만큼 이 책은 기독교의 정신으로 꽉 채워져 있었지만 어릴 때는 이를 알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특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주인공의 말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워서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리송한 얘기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책을 읽어나가던 중에도 이 책 중간 어디쯤의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지금도 강렬한 가르침을 준다.


사람에게 땅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까

나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할까


한참이 흘렀다. 열세 살의 나에게 충격을 안겼던 이 한편은, 다들 눈 감고 아웅하며 못 본 체 하는 진실을 우회하지도, 숨기지도 않은 채 의미심장하며 거대한 깨달음을 안겨 준다. 톨스토이가 이 한 권의 책에서 전하고자 한 신의 아들이 전파한 ‘사랑’과 ‘용서'와 '구원'과 가장 먼 이야기.


사람에게는 사람만큼의 땅이 필요하다.


+ 어른이 돼서 톨스토이를 다시 읽으니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얼마 전에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은 분이 본인이 좋아하는 축구에 빗대어 쓴 독후감을 인상 깊게 읽었다. 책 제목도 인상적이었고 독후감도 인상적이었고 작가의 이름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페터 한트케의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두께가 얇길래 무턱대고 두 권을 빌렸다. 한 권은 묘사와 묘사와 묘사가 이어지는 내내 제목 그대로 긴장감과 불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권은 읽고 보니 짧은 이별을 위한 긴 편지였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으면 그림들이 생각난다. 고전과 근대를 오가는 서양 화가들의 그림들. 세잔의 정물화라든가, 역시 세잔의 카드 하는 남자들, 또는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이라든가 뭐 그런 순간을 묘사한 그림들을 떠올리게 하는, 페터 한트케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다.

특히 세잔스러운 묘사들을 읽고 있으면 그는 결국 <세잔의 산, 생빅투아르의 가르침>을 쓸 수밖에 없었네라며 필연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밖을 바라보자, 스쿨버스가 서 있는 시장의 한 면이 보였다. 카페 안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는, 불을 피우지 않는 벽난로와 우산이 걸려 있는 옷걸이가 좌우 벽면에 있었다. 그 는 뮤직 박스가 있는 다른 벽면도 바라보았는데, 골라 놓은 번호 옆으로 전파 빛이 천천히 가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담배 자동판매기, 그 위에 다시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 벽 앞에서는 주인이 계산대 뒤에 서서 여종업원이 쟁 반에 담아 들고 옆에 서 있는 맥주병의 뚜껑을 따 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에 젖어 지저분해진 구두를 신고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고, 탁자 위에는 큼직한 재떨이, 그 옆에는 작은 꽃병 그리고 마침 아무도 앉지 않은 옆 탁자에는 포도주가 가득 든 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스쿨버스가 출발한 후 내다본 바깥 풍경이 그림엽서의 풍경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쪽에는 관상용 분수 옆으로 중세의 흑사병 극복을 기념하는 원주(WAE)가 서 있고, 저쪽에는 엽서 가장자리에 보이는 자전거 주차대의 일부가 있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먼저 읽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보다 남는 게 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 간의 대화에서보다 그가 묘사하는 순간들 안에서 글이 더 잘 보인다. 슬프고 외롭고 쓸쓸한데 또 아름다우면서 절박하지 않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같은 것들이 묘사 안에 담긴다.

나는 몇 개의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덧 가로등이 불빛을 밝혔고 하늘은 푸르디푸르게 빛났다. 나무 아래 목초들은 석양의 미광을 반사했다. 뜰 앞의 덤불숲에서는 꽃잎들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다른 편 거리에서는 덩치 큰 미국 자동차의 문이 닫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제퍼슨 가로 되돌아와 스낵바에서 진저에일을 한 잔 마셨다. 알코올 음료를 취급하지 않는 스낵바였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두 권을 연달아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느꼈나- 집중할 수 없음을 느꼈다.

나는 그 내용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소설을 써 내려간 방식에 집중했다. 묘사를 넘어선 묘사가 이어지고, 그의 묘사 안에서만 인물이 살고 감정이 살아서 감히 다른 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페터 한트케가 추구한 대로 언어 자체로의 예술성을 내가 따랐나 싶다.



달려라, 토끼 - 존 업다이크

가족 중 한 명이 존 업다이크를 좋아했다. 그를 좋아한 건지 그의 책을 좋아한 건지 확실치 않지만, 우리 집에는 그의 책이 꽤 있었다. 이제 한 번 읽어볼까 해서 찾았는데 상자에 넣어서 창고에 갖다 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도서관의 세계문학 주변을 도는데 귀여운 제목이 보였다. 달려라, 토끼 - 존 업다이크가 작가였다. 반가운 이름 존 업다이크. 그럼 읽어봐야지. 귀여운 제목과 달리 내용은 귀엽지 않았다.


귀여운 제목의 달려라, 토끼는 미국적이다. 굉장히 미국적이다. 첫 페이지를 읽어가는 순간부터 이건 미국이다. 내가 말하는 미국적임은 그 모든 단어들의 나열의 미국스러움이다.


이 책의 초반을 읽고 있으면 피츠제랄드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서의 거대한 삶, 미국식 주택과 신식 도로들, 이제는 이미 낡아버린 그 모든 것들이 거대하고 황량하게 묘사되는 것. 절대적인 미국적인 것들.


그 절대적인 미국적인 것들에는 사실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그 양극단을 세밀화 그리듯 묘사한 존업다이크의 글은 거대하고 황량한 대륙의 수많은 소도시들에서 살아가는 위태로운 가정의 위태로운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달려라, 토끼.


미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 미국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 미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그냥 위태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며 오에 겐자부로도 떠올리게 한다. 그 무언가를 겪고 스스로의 내부로만 파고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거대하고 황량한 대륙에서 결국에는 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


도시는 공원 아래쪽에 줄줄이 늘어선 인형의 집들로부터 시작하여, 타르 지붕과 반짝거리는 차들이 점점이 박힌 붉은 화분 빛깔의 널찍하고 흐릿한 배를 거쳐 뻗어나가다, 또렷한 강 위에 걸린 안갯속에서 장밋빛으로 끝이 난다. 그 연기 속에서 가스탱크들이 희미하게 빛난다. 그 속에 교외가 스카프들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도시의 중간은 거대하다. 그는 입을 벌린다. 영혼의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도시의 진실의 맛을 받아들이려는 듯이. 진실은 아주 묽은 용액 상태의 비밀이라 이런 광대한 상태에서만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듯이. 공기 때문에 입이 마른다.
그의 하루는 하느님 때문에 성가셨다. 루스는 조롱을 하고, 에클스는 눈을 껌뻑였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왜 그런 것들을 가르쳤을까? 여기 서보니 이런 바닥이 있으면 천장이 있다는 것. 우리가 사는 진정한 공간은 위쪽 공간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가 죽어 가고 있다. 이 넓게 뻗은 벽돌들 안에서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생각이다. 단순한 비율의 문제다. 이 거리들을 따라 늘어선 어떤 집에서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다음 순간에 죽는다. 저 납작하게 엎드린 장미의 핵심이 갑자기 돌이 되어버린 가슴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는 그 자리를 찾으려고 눈을 움직인다. 혹시 암으로 시커메진 노인의 영혼이 줄을 타고 오르는 원숭이처럼 파란빛을 통과하여 올라가는 것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그는 발치에 나타난 이 불그스름한 환상이 이 현실을 포기하는 순간, 그 해방의 고통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정적이 그를 강타한다. 차들이 소리도 없이 줄을 지어 기어간다. 어떤 문에서 점이 하나 나온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걸까? 허공에 서서? 왜 집에 있지 않은 걸까? 겁에 질려 루스에게 간청한다. "나 좀 안아줘."


+ 미국 소설을 자주 읽지 못했다. 우직하면서도 복잡하고, 단순함 뒤에 차가운 면들, 너무 거대한 그곳의 황량함, 특히 이 황량함이 미국 소설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래도 이젠 읽긴 읽는다. 읽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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