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아가사 크리스티, 아가다 크리스티...... 애거서 여사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난감했던 문제이다. 애거서도 좀 어색하고, 아가사는 더 어색한 것 같고, 아가다는 뭔가 좀 더 그렇잖은가.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나 혼란해하는 통에도 그의 명작들은 그녀의 다양한 이름을 훈장 삼아 번역이 되고 또 번역이 된 그의 책들을 다시 읽으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누명 Ordeal by Innocence
애거서 크리스티 스스로가 선택한 베스트 10에 속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1958년 작.
한국어로는 간단히 "누명"이라 제목 지어졌지만 원제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지는 못한 것 같다. 원제 그대로 “무죄에 의한 시련"으로 해석해도 사실 그 함축하는 바가 아리송하다. 한참 생각해 본 결과 결백과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불유쾌한 시련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누명은 책으로 읽기 전에 드라마로 먼저 봤다. 글로 묘사된, 누명의 한가운데 있는 재코를 그대로 반영한 듯한 배우덕에 몰입이 잘 된다.
하지만 이 책의 뛰어난 심리 표현을 제대로 느끼려면 역시 책으로 읽는 편이 좋다. 어떻게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은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미묘하고 정교하며 대상을 꿰뚫는 심리 묘사에는 감탄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
그것이 이 사건의 동기라면 유일한 동기이고 좀 독특한 동기지만 법률의 시각에서 보면 강력한 동기라고는 할 수 없어.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는 것, 자기보다 힘이 강한 인물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아질 부인이 죽는다 해서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경찰은 이 사건에 동기가 있다는 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재정을 관리하는 신탁인들에게 아질 부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말이야. 오, 그래, 그녀의 죽음은 그들 모두를 자유롭게 했어. 비단 헤스터뿐만 아니라 말일세, 리오는 자유롭게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게 됐고, 메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남편을 돌볼 수 있게 됐고, 미키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됐거든. 도서관에 앉아 있는 작은 검은 말 티나까지도 자유를 원했었을 거야
구해 준, 또는 구원해 준 사람에 대한 증오심
자유를 준 사람은 정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 준 것이 맞는가
호의에 무조건 고마워해야 하는가
자선은 정말 미덕의 대상인가
아름다운 사랑의 말로 누군가를 속이는 사람이 죄인인가, 그 말에 속은 사람이 죄인인가
헌신은 사랑인가, 속박인가
그리고 사랑이었는지 몰랐는데 사랑이었던 것
이 소설은 한 명의 의지인지 집착인지 모를 꿈에 의해 현대적으로 새롭고 희망차게 구성된 한 가족의 모습 안에서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다중적 감정의 속성을 그려낸 정말 뛰어난 심리 추리 걸작이다.
코끼리는 기억한다 Elephant can remember
애거서 크리스티의 82번째!! 추리소설로 1972년 작
이 책은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싶을 때 처음 읽었다. 크게 요동치는 내용이 없는데도 다 읽고 나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어디선가 사건에 휘말려서 에르큘 포와로에게 달려오는 소설 속 추리소설 작가인 올리버 부인이 등장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조연들을 출연시켜 연극적인 요소를 극대화하곤 한다. 인물이 많아지면 내용이 흐트러지기 마련인데 애거서 크리스티의 조연들은 양치기가 양 떼 몰 듯 오히려 내용을 한 곳으로 모으는 효과를 제공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단순한 감정을 다룬다.
질투라는 감정.
질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로 복잡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결말은 어째서 파국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얘기한다. 질투는 인간이 존재한 이후로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인간을 멸망으로 이끌기도 한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사실 전 치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틀니를 했다면 -_ 글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하니까요."
"아!" 포와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지. 치과의사가 많은 걸 해줄 수 있겠지만, 모든 걸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맞아요. 전 우리 인간의 치아는 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도 개처럼 진짜 상아질 치아를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는, 어떤 동물들이 상아질 치아를 갖고 있나 생각해 봤죠.
해마와 그 밖에 몇몇 동물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다가 코끼리 생각을 하게 되었죠. 상아하면 누구든지 코끼리를 떠 올리지 않나요? 거대한 코끼리 엄니 말이에요."
"그렇죠." 포와로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올리버 부인이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아직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코끼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 말에 따르면, 코끼리는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나도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긴 합니다."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코끼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대요.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저력은 이렇게 별거 아닌 대화에서 실마리와 관심을 동시에 끌어내는 것에서도 빛난다.
파도를 타고 Taken at the flood (미국제목 There is a tide)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8년 작.
미국 제목은 왜 There is a tide로 붙였는지 모르겠다. 원제인 Taken at the flood가 훨씬 충실한 제목이다.
전쟁이 끝나고 아래와 위가, 왼쪽과 오른쪽이 (정치 얘기 아님), 앞과 뒤가 마구 섞여버린 시절, 자산가 친척에게 기생하다시피 살던 일가의 잔잔한 호수에 자갈이 하나 던져지고, 그로 인한 파동은 여럿을 죽이고, 또 여럿을 살리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Atonement 영화가 떠올랐다.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유럽의 많은 도시는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공습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슬프면서도 우습게도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잔인하리만치 살아날 기회를 찾아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휘장 삼아 희미한 유령처럼 살게 되기도 한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무려 1934년도 작품이다.
열차 안에서 벌어진 잔인한 살인의 동기와 범인을 추적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 보면,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만 보면 그렇게 열차 타고 여행이 하고 싶어진다. 특히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꼭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안타깝게도 이제 1934년도의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타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책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앨버트 피니가 포와로를 맡은 1974년도 영화는 배우진이 호화롭다. 잉그리드 버그만, 로렌 버콜, 마이클 요크, 리처드 위드마크, 숀 코너리,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들이 심지어 조연으로 나오지만 이 소설의 구성상 결국 주연 같은 조연들이다. 앨버트 피니의 포와로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후 2001년과 2010년에는 TV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내용은 당연히 같지만 2001년도 드라마가 약간 코믹한 요소를 가미하여 밝게 만들어졌다면 2010년도 데이빗 서쳇 주연의 드라마는 깊고 어둡다.
2017년 케네스 브래너의 에르큘 포와로는 불필요하게 관념적이지만 그래도 케네스 브래너의 명성 덕에 데이빗 서쳇의 포와로만큼이나 브랜드 밸류가 생겼다.
소재만 보면 흥미롭긴 하지만 작위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면 어떤가, 재밌으면 그만이다.
푸른 열차의 비밀 The mystery of the blue train
1928년 작,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애거서 여사에게는 최악의 작품이었다고.
스파이와 재벌과 재벌딸
사기꾼과 보석상과 배우와 탐정
세인트메리미드와 파리와 그리스
호화로운 기차와 보석
귀족과 소도시 아가씨와 재벌 비서의 삼각관계
그리고 에르큘 포와로
온갖 재밌는 게 섞여있는데 재미없을 수가 없다.
따뜻하고 다정하며 조용한 아가씨와 오만하고 차갑지만 역시나 조용한 아저씨의 미묘하게 얽힌 관계도 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오락 콘텐츠로써의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 데이빗 서쳇의 포와로 드라마 시리즈는 중간중간 못 본 에피소드들이 있다. 그래서 다시 보곤 하는데, 볼 때마다 너무 재밌다.
미스 마플 드라마 시리즈도 전부 봤다. 역시 너무 재밌다. 미스 마플역을 맡은 배우가 중간에 한 번 바뀌는데 안 바뀌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사랑 얘기를 포함한 경우가 꽤 많다. 로맨티시스트 스릴러 장인 애거서 크리스티
+ 나는 부부탐정 시리즈를 제일 좋아한다. 터펜스와 토미가 스무 살 남짓 만나 중년이 되어서 여러 사건에 휘말리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도 재밌지만, 무엇보다 터펜스와 토미 시리즈는 전쟁 중 첩보물의 요소도 많이 녹아있어서 훨씬 스릴있으면서도 코믹하게 재밌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재능에 또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