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의 영화들 - 강박적 미학을 향하여

미학적으로 구현된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by 마나스타나스

스페인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Javi Aznarez 하비 아즈나레스- 그의 독특한 일러스트레이션 때문에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를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매거진을 위해 그린 그의 삽화들은 간결한 선 속에 매거진과 기사의 핵심을 장난스러우면서도 무게감 있게 담아내는 매력이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을 자주 찾아보는 이유다.


웨스 앤더슨은 '프렌치 디스패치' 이전부터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확립했다. '문라이즈 킹덤'부터 그의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미와 연극처럼 과장된 연출이 돋보인다. 특히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한 색감의 조화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아름다움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희석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처음 본 그의 영화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그의 영화 세계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의 세계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친밀한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치부하지만 별 거였던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는 과정에서의 상처와 회복에 그 중심이 있다. 다질링 주식회사나 로열 타넨바움을 보고 난 후 생각한 부분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연극적인 과장된 요소와 예쁜 연출은 트레이드마크처럼 남아있지만 덜 강박적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의 영화 세계는 확연히 달라진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강박적으로 미학적 아름다움을 구체화하고 극대화한 미장센에 집착한다. 내용의 측면에서도 가족적인 친밀함의 경계를 넘어서 타인들 간의 정서적 공감을 다루기 시작한다. 내용의 변경과 구성의 변경 중 무엇이 먼저였을지 모르겠지만 호텔이라든가, 잡지라든가 하는 타인과 타인을 잇는 매개체의 등장은 타인들과의 연대라는 맥락에서 당연했거나 불가피했거나 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해 본다.


사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본 것은 아니었다.


아즈나레스의 일러스트 때문에 기다렸던 '프렌치 디스패치'는 무슨 이유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개봉이 연기됐던 것 같다. 그래서 아쉬웠고, 개봉했을 땐 꽤나 반가웠다. 원래 크게 기대하는 편은 아닌데, 가끔 이렇게 기다리던 작품이 개봉하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 영화는 누군가와 같이 영화관에서 봤다.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 영화가 너무 좋았던건지, 아니면 영화관 가는 걸 워낙 좋아해서 누구와 갔는지 잊을 정도로 들떴던 건지 모르겠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예쁘긴 했지만 난해한 영화라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영화관 맨 뒤에 앉아서 예쁘게 시작해서 예쁘게 끝나는 영화를 봤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잠들었다.



웨스 앤더슨은 요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는 지나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희미한 흔적만 남은 사랑과 외로움, 고독, 헛됨과 공허는 약간은 탁한 원색의 세상 속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아련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의 경계에서 선 아이들의 모험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문라이즈 킹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어딘가 결핍된 세 남매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했던 부모(아빠)의 관계 회복을 그린 '로열 테넌바움'

각기 다른 이유로 떠나간 부모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찾아 떠나는" 세 형제의 여정을 그린 '다즐링 주식회사'

한때 번성했던 아름다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벌어진 미스터리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늙은 호텔 지배인의 이야기


그리고 '프렌치 디스패치'는 과거에는 기술자들의 도시로 유명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저 그런 빛바랜 도시가 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프랑스 축소판 같은 가상의 도시에 "디스패치 된" 특별한 기자들의 사소하지만 거대하고, 그래서 덧없기도 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취재기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미국의 깡시골 캔자스에서 발행되는 "리버티, 캔자스 이브닝 선"의 프랑스판 주간지로, 프랑스의 한 도시 앙뉘쉬르블라제에서 발행된다. 가상의 도시 이름인 '앙뉘쉬르블라제'는 "무감각해진 것에 대한 권태로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무감각해져 권태로워진 쇠락한 도시에 대한 단상들을 미국인의 시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게 내 생각).


4개의 섹션으로 나뉜 주간지 '프렌치 디스패치'는 각 섹션에서 단조로운 일상의 변화, 가장 고독한 곳에서 발견한 고독한 이들의 예술적 연대, 젊은 날의 헛된 혁명의 결말, 그리고 글로 기록된 아름다운 맛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다룬다. 이 모든 것은 "No Crying"이라는 문패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고 잊힐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외로움과 고독이란 단어를 생각했다. 아름다움 속에는 고독이 있기 마련인가 싶기도 하다 - 이런 점에서 '프렌치 디스패치'의 두 번째 섹션, 모제 로젠탈러의 그림 이야기는 강렬했다. 가장 외로운 공간에서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이 남긴 로젠탈러의 파괴적이면서도 쓸쓸한 벽화 연작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예술인들"의 찬사를 받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캔자스의 외딴 옥수수밭에 홀로 남겨진다.


+ 연극적으로 과장되고 화려하게 연출된 장면들 속에 웨스 앤더슨은 장난스러움과 진중함을 교묘하게 섞어 이 장면이 과연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인지 한참 동안 생각하게 만든다. 비유인가 은유인가,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비유이며 은유인가, 그 비유와 은유는 얼마나 유효한가, 그 비유와 은유 뒤의 실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나의 이해는 맞는 것일까 틀린 것일까 - 그의 미학적인 관점에서 되살아난 지나간 것들의 흔적처럼, 그가 만들어낸 비유와 은유 또한 겉으로는 가벼워 보인다. 결국엔 하찮고, 지루하고, 우습고, 권태로운 그 모든 것을 실재하게 하는 것은 극대화된 아름다움이다.


+ 웨스 앤더슨은 선호하는 배우가 명확하다. 역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로는 더욱 명확해진 것 같다. Adrien Brody와 Bill Murray는 그 옛날부터 고정이고, 영화의 성격에 따라서 약간씩 변주를 주지만 결국 선호하는 인물들은 명확하다.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외모가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배우로서는 다양한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들- Tilda Swinton, Edward Noton, Anjalica Huston, Owen brothers, Sairosa Lonan, Tony Revolori 같은 배우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아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