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브라/사기꾼- 시대가 저버린 스파이 대장들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소설들은 항상 재밌다. 너무나.

by 마나스타나스

미국 TV쇼 앨리어스 Alias는 2001년부터 5년간 방영된 첩보 드라마다. 제니퍼 가너가 시드니 브리스토 역을 맡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능가하는 중세 이탈리아의 천재 마일로 램발디가 남긴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이 드라마는 시드니의 부모 모두 스파이라는 설정이 특징이다. 아버지는 CIA 소속 이중첩자이며, 젊은 시절 소련 출신 여성 첩보원과 사랑에 빠져 시드니를 낳는다. 시드니의 어머니는 뛰어난 외모와 지능을 바탕으로 10대에 KGB 스파이로 발탁되어 평생 첩보원으로 활동하며 CIA 요원들을 제거한 인물이다.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시드니는 외모와 지능 모두 뛰어나며, 대학 신입 시절 스파이로 발탁된다. 10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적으로 다시 만나고, 이후 가족 모두 기상천외하고 위험한 첩보 임무에 투입되며 갈등과 모험을 겪는다. 1989년 고르바초프가 냉전 종식을 선언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이 드라마에는 여전히 유령이 배회한다. 동유럽과 러시아를 배회하던 유령, 냉전의 잔재이다.


오랜만에 앨리어스를 보며 프레데릭 포사이스가 떠올랐다. 첩보물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포사이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코브라, 면책특권, 사기꾼을 읽게 되었다.


코브라는 프레데릭 포사이스가 201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전작 어벤저와 마찬가지로 CIA 대테러국장 출신 폴 데브루와 전직 군인이자 변호사인 칼 덱스터가 등장한다 (어벤저는 아직 읽지 않았다).


코브라는 포사이스의 다른 작품, 전쟁터의 개들을 떠올리게 한다. 고독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유능한 리더가 전직 동료나 그에 필적하는 인물들을 모아 거대한 임무를 수행한다. 흉내 낼 수 없는 포사이스의 장기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수십 개 언어에 능통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완벽히 실행하는 일흔의 전직 CIA 요원 폴 데브루는, 전쟁터의 개들의 캐트 샤넌이 세월을 먹은 모습처럼 보인다.


포사이스는 냉전의 유산을 잘 활용하는 작가지만 그의 작품 속 세계는 냉전에 머물지 않는다. 코브라 역시 그렇다. 냉전 시대에 그 가치가 최고에 달했던 폴 데브루는 메인주 알렉산드리아의 고택에 은둔하는 현대 미국의 귀족이다. 지나치게 똑똑하고 금욕적인 그는 집요하고 은밀하게 임무를 수행하며, 냉전의 게임 규칙을 21세기 마약과의 전쟁으로 가져온다.


대통령으로부터 마약과의 전쟁에 필요한 전권을 위임받은 폴 데브루는, 본업은 현상금 사냥꾼이지만 앞으로는 변호사 노릇을 하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 출신 칼 덱스터를 기용해, 콜롬비아를 거점으로 세계 마약 시장을 장악한 돈 디에고 에스테반의 왕국을 뿌리째 파괴해 나간다. 그 과정은 철저하고 체계적이다. 여기서 포사이스의 재능이 드러난다. 체계적이면 지루해질 수 있다. 그러나 포사이스의 정교한 스토리텔링은 독자에게 쉴 틈도, 도망갈 틈도 주지 않는다.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 속에 각 단계의 세밀함이 녹아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방대한 자료에서 추출한 실제 정보가 깔려 있다.


돈 디에고의 마약 왕국이 거의 무너져 갈 무렵 반전이 있다. 전쟁터의 개들에서는 마지막 페이지 몇 줄로 반전을 압축했던 포사이스는 이번엔 여러 장을 할애해 반전의 여운과 쾌감을 독자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캐트 샤넌은 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 준 뒤, 정작 자신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반면, 폴 데브루는 마침내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캐트 샤넌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어떤 일을 오래 하다 보면, 그 일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그렇게 매너리즘에 빠져든 사람이 맞이하는 마지막. 포사이스는 그 끝마저 놀랍도록 정교하게 그려낸다.


포사이스는 1990년대에 사기꾼을 출간했다. 작은 글씨로 채워진 300여 쪽의 책 두 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이지만 4편의 다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또 장편이라 볼 수는 없다.


사기꾼의 원제는 The Deceiver다. 영국 SIS에 신설된 데스크의 공식 명칭은 Deception, Disinformation, and Psychological Operations로, 줄여서 Dee-Dee and Psy Ops, 더 간단히 Dee-Dee라 불렸다. 신설 데스크에는 책임자가 필요했다. 설비 데스크 책임자가 Quartermaster 보급 장교로, 법률 데스크 책임자가 Lawyer 변호사로 불린 것처럼, 디-디 데스크 책임자에게는 Deceiver, 즉 ‘사기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이는 책 상권 서두에 언급된다).


사기꾼은 총 4개의 별개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리고 구름 위 하늘에서 길을 잃은 전투기를 이끌어 착륙 유도하는 기체를 의미하는 Shepherd라는 아름다운 단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4개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역시 고독한 분위기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년의 디-디 데스크 수장, 샘 맥크레디다. 샘 맥크레디도 폴 데브루처럼 냉전 시대에 빛났지만, 냉전이 끝난 후 퇴물 취급을 받으며 퇴임을 종용받는다. 그런 그가 맡았던 네 가지 사건이 이 책을 이룬다.


냉전에 대한 두 이야기, IRA 관련 이야기 한 편, 그리고 영국령 섬에서 일어난 국제적 살인 사건 한 편에서 샘 맥크레디는 한결같이 고독하고 무심하지만 결코 아쉬울 것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난 아쉬울 것 없이, 변명하지 않고 사는 사람을 정말 좋아한다.)


사기꾼을 읽으며 영국과 미국이 자금을 대고 제작한 TV 쇼 Strike Back이 떠올랐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잔혹하지만, 시원하고 통쾌하며 게다가 웃겨서 종종 다시 보게 되는 이 드라마는 포사이스의 소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을 느꼈다.


이 책의 세 번째 에피소드 ‘전쟁의 희생자’는 영국 본토와 IRA의 충돌을 다룬다. Strike Back에서 그려진 IRA의 소름 끼치는 잔혹함은 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묘사된다. (물론 이는 IRA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폭력이 그 이유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상대의 폭력에 더 큰 폭력, 더 잔혹한 폭력으로 맞서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영국 본토 사람들을 ‘악’으로 학습한 이들은 신을 섬기면서도 영국의 어린아이가 테러로 참혹하게 죽는 일을 ‘신의 뜻’, ‘신의 분노’라 받아들인다. 이쯤에서 미시시피 버닝이 떠올랐다. 학습된 증오, 그리고 그 증오가 낳은 희생자들. 테러리스트 또한 결국 희생자였다.


첫 번째 에피소드 ‘소란스러운 유령’ 역시 비슷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이야기는 동독과 서독을 오가며 정신적으로 학대당한 한 서독 공무원이 서방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정신이 무너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그린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희생되었을까.


재미로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고 난 뒤 마음이 착잡했다.


그리고 면책특권. 첩보나 냉전, 마약, IRA와는 거리가 먼,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에서 느끼는 분노와 증오를 다룬 단편집이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포사이스의 다른 작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영국식 유머'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흥미롭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No comeback으로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단편에서 따왔다. 면책특권 또한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이다. 두 단편 모두 매우 흥미롭다.


프레데릭 포사이스가 영국인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묘하게 체스터튼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집이다.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책은 이미 여러 권 있지만, 이에 더해 갖고자 했던 책들은 거의 절판 상태였다. 그 점이 이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했던 존 르 카레의 책들은 여전히 잘 팔리고 인기도 높다. 그런데 왜 포사이스의 책은 그렇지 않을까 (나는 존 르 카레 또한 매우 좋아한다).


며칠간 두 작가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봤다. 무엇이 다른 걸까?


포사이스는 개인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그들에 맞춰지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속한 조직—불법과 합법, 정의와 불의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조직들이—더 큰 불법과 불의로 구성된 거대한 조직(나라, 왕국, 특정 인물 등)을 무너뜨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포사이스의 작품은 정보전 중심의 첩보물이라기보다는 군사조직을 통한 대테러전에 가까운 스파이물이다. 더 터프하고, 더 건조하지만, 무디거나 둔하지 않다. 이는 포사이스의 업력과 재능 덕분이다.


반면, 존 르 카레는 개인에게 집중한다. 그는 정보전과 심리전을 그린 작가로 그의 작품을 읽으면 포사이스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외로움, 고독, 쓸쓸함이 다가온다. 이 또한 스파이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업력과 이를 글로 전달해 낸 그의 재능 덕분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책을 보고 다시 이어보겠다-


(덧붙임)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책들이 절판 상태여서 결국 중고로 몇 권을 샀다. 꽤 비싸게 주고 샀지만 후회는 없다.


(덧붙임) 스파이물이 요즘 아주 풍성하다. the genre of espionage. 서로를 못 믿는 시대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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