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2차원 영토는 3차원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미셸 우엘벡은 자신의 가장 ‘순한 맛’ 소설 제목을 이 문장에서 가져왔다.
전시실 입구에는 한쪽 구석에 2미터 가량의 통로만 남겨둔 채 커다란 패널이 가로놓여 있었다. 제드는 그 패널 위에 게브빌러 산맥 근처를 촬영한 인공위성사진과 같은 지역의 미슐랭 지도 확대사진을 나란히 붙여놓았다. 그 대조가 가히 충격이었다. 인공위성사진이 희미한 파란 얼룩이 흩뿌려진 어느 정도 균일한 초록색의 죽 한 사발에 불과해 보였다면, 지도는 지역구분선, 생 동감 있는 길들, 지도의 시점, 숲, 호수, 언덕들의 그물망을 화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두 확대사진 위에는 검은색 대문자로 전시회 제목이 쓰여 있었다.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지도와 영토>는 주인공 제드 마르탱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예술과 노동,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정교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책 소개는 이렇게 요약된다.
"화가 제드의 삶과 예술활동의 궤적을 따라가는 이 소설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현대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상업적 측면에서 적절한 설명이지만, 작가는 이 문구에 동의했을지 모르겠다.
건조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문장과 구성은 낯설지만 중독성이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2011년에도, 최근 다시 읽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적이지만 어딘가 우울하고 내성적인 제드 마르탱의 어린 시절은 부유했지만 불우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살 때 자살했고, 이후 그의 아버지는 일에 매달려 성공한 건축가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미적 재능이 있었던 제드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미슐랭 지도에서 영감을 얻고, 그 지도를 확대·축소한 연작 사진들로 주목받는 예술가를 넘어 성공한 예술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세 명이다.
장 피에르 마르탱: 제드의 아버지. 성공한 건축가였고, 말년에는 치유되지 않는 병으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스위스의 어느 강에 뿌려진 재로 돌아간다.
올가: 러시아 출신의 미슐랭 홍보 담당자이자 제드의 연인. 그의 성공을 열어준 인물이며, 프랑스 문화에 대한 애정과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
미셸 우엘벡: 작가 본인이자 작품 속 인물. 성공한 작가로 아일랜드에 은둔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제드의 전시 서문을 써준 정신적 멘토이자, 그에게 제2의 예술 인생을 열어준 인물이다.
셋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제드의 곁을 떠났다. 그의 의지와 무관했거나, 그의 무의지 때문일 수도 있다.
제드의 예술 활동은 세 시기로 나뉜다.
1기는 미슐랭 지도 이미지 자체를 사진의 주제로 삼은 초기작. 제한된 수량으로 배포되어 예술성과 희소성을 동시에 획득한다. 제드의 예술 인생의 시작점이다. 미슐랭 지도는 미슐랭사社가 미식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한 지도이다.
2기는 '직업 시리즈'라 불리는 회화 연작으로 이루어진다.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인물들의 노동의 순간을 그린다. 팰러알토에서 만난 잡스와 게이츠, 부가티 공장을 둘러보는 피에히, 성공한 건축가이자 제드의 아버지인 장 피에르 마르탱의 은퇴의 순간 등 - 이 시리즈로 그는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역설적으로 시대가 원하는 "예술"로 막대한 부를 구축한 제프 쿤스와 데미언 허스트의 만남을 그리려던 마지막 작품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찢어버린다.
3기는 흘러가는 자연의 반복과 현대의 분해된 기술이 부식되어 사라지는 순간을 겹쳐 담은 미디어 아트 작업으로 구성된다. 이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제드는 사망한다.
이렇게 다소 고루해 보이는 진중한 인상은 국립예술대학 입학신청서를 심사하는 교수들에게 호감으로 작용했다. 그는 분명 개성적이고 박식하고 성실한 노력형 후보자였다. 또한 '삼백 장의 철물 사진'이라는 제목의 포트폴리오 자체도 놀라운 미학적 완성도를 보였다. 철물의 광택과 위협적인 형태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드는 콘트라스트를 자제하고 중성적인 조명을 사용해 중간 톤의 회색 벨벳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그 결과 너트와 볼트와 열쇠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보였다.
비록 오늘날에는 그저 역사 속의 색다른 문헌으로 간주되지만, 우엘벡의 텍스트- 제드 마르탱의 작품에 헌정된 최초의 본격 평문-에 일견 흥미로운 직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제드 마르탱의 작업에 주제와 테크닉의 다양함을 뛰어넘는 일관성이 있음을 처음으로 환기시킨다. 예술가가 대학 시절을 포함해 수년간 공산품의 본질을 좇는 데 헌신한 후, 작품 이력의 제2기로 넘어가 이번에는 그 공산품의 생산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는 사실에서 심오한 논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책에서 발췌한 위의 두 단락을 통해 작가는 현대 사회의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너무 뚜렷하고 솔직해서 오히려 모호했던 작가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이 책을 세 번을 읽고서야 알아챘다.
제드는 그의 작품과 예술 세계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한 적이 없다. 그의 작업과 창조물들은 남들에 의해 분석되고 해석되며 예술로 "의미"를 부여받는다.
결국 미셸 우엘벡이 생각하는 예술이란 의도되고 협의된 것, 누군가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것, 그래서 허상에 불과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은 소설 후반의 한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손가락 하나로 전파 속으로 사라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화려한 기교와, 스쳐 지나간 눈길 한 번으로 수억 원의 가치가 창조되는 현대 예술의 현재. 그런 의미 없는 화려함 속에서 우엘벡은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 자체를 비웃는다. 창조되는 동시에 공허 속으로 사라지는 현대 예술의 잔상들 (미셸 우엘벡은 물 흐르듯 뜬금없는 문맥의 전환을 통해 그가 모호하게 전개했던 것을 순간에 명확하게 드러내는 방식에 뛰어나다.)
프랑스 뮤직 채널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내보내고 있었는데, 인위적이고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기교에 이내 질렸다. 제드는 라디오를 껐다. 이제껏 음악을 좋아한 적도 없었지만, 지금은 특히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투신하게 된 이유, 심지어 세상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언뜻 떠올렸다. 세상은 감동적인 예술의 주제가 되지 못하며, 그 자체로는 특별한 재미도 마력도 없는 이성적 장치로 나타나는데 말이다. 그는 교통정보만 나오는 오토루트 FM으로 채널을 돌렸다. 퐁텐블로와 느무르 지점에서 사고가 났다. 파리까지 거북이걸음을 면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제드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서는 의미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장은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맥락과 닿아있다 (책에서 발췌).
장례식 날 제드는 다소 지친 상태였고, 신부의 강론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에 관한, 그리고 역시 희망과 부활에 관한 강론이었다. 결론적으로 메시지는 명료하지 않았다. 반면 길이 반듯반듯하고,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 정연하게 구획이 되어 있고, 크기가 일정한 자갈을 깐 몽파르나스 묘지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하고 명료했다. 우엘벡과의 관계가 불가항력에 의해 끝났다는 것. 그의 주위에 모여 있는, 그가 모르는 사람들도 그 확실한 사실에 공감하는 듯했다. 그리고 묘지에서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며 제드는 불현듯, 아버지가 기어이 안락사 계획을 강행하고야 말리라는 온전한 확신이 들었다. 조만간 그는 요양원 원장의 전화를 받을 것이고, 모든 것이 결론도 해명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릴 터였다. 당신의 마지막 말은 결코 듣지 못할 것이며, 그에게 남는 것은 회한과 무기력뿐이리라.
우엘벡의 장례식 날, 제드는 지쳐있었고 고통과 희망, 그리고 부활에 대해 얘기하는 신부의 강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에 몽파르나스 묘지로 향하는 길은 반듯했고 질서 정연하여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했고 명료했다 - 지도와 영토,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지금은 미셸 우엘벡의 초년작 <소립자>를 읽고 있다. 우엘벡의 문장은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백과사전처럼 나열된 정보들, 절제된 감정, 건조한 문체.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처럼 글을 쓴다.
그 무엇도 특별하지 않아서 그 어떤 것도 거칠게 없는 사람이 미셸 우엘벡이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동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