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지울 것
『쿰란』은 2000년에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신문에서 출간 기사를 본 엄마는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오라고 했다.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던 시기였고, 인기 있는 책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빌릴 수 있었다.
쿰란은 사해 근처 사막의 암벽 동굴지대다. 에세네파라는 유대교의 한 종파가 그곳에 은둔하며 자신들만의 교리를 세웠고, 사해문서라 불리는 방대한 양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남겼다.
‘쿰란’이라는 지명도, 예수의 비밀이 숨겨졌다는 사해문서의 설정도 매력적이고 흥미로웠지만,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2011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해였다. 그해, 도망쳐봤자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몇 년을 보내야만 했다. 내 스스로 초래한 괴로움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요즘 많이 들었던 ‘도망친 곳에는 천국이 없다’는 말 그대로였다.
사무실 책상에서도, 내 방에서도, 잠을 자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하나의 생각을 멈출 수 없어서 걷고 또 걸었다. 지치면 잠을 잘 수 있었다.
한 달 남짓, 거의 매일 술도 마셨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 마시는 편도 아니지만 술을 마시면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아졌다.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고, 괴로운 기억은 삭제된 것 같았다. 그 순간의 희미하게 좋은 기분은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술도 결국 도피의 다른 형태였을 뿐이다. 그 끝에는 천국이 없었고 망가진 위장과 매일 같은 두통만 남았다. 무엇보다, 술이 깨고 난 후에는 삭제된 줄 알았던 그 생각이 더 또렷하게 돌아왔다. 그렇게 술로 잊어보려한 시도는 술은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가장 괴로웠던 해에 내가 한 가장 잘한 일이었다.
내 괴로움은 가족에게도, 회사 사람들에게도,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성품의 문제도 있었다. 나는 그런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괴로움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면 흩어졌을텐데 - 결국 그러지 못했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감정적으로 더 많이 동요될 것 같았고, 어쩌면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해문서처럼 숨겨져 있어야만 하는 내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그 생각을 품고 걷다 보면, 생각은 점차 가지를 뻗었다. 그 생각은 한쪽으로는 뿌리를 내려 괴로움을 깊게 했고, 다른 쪽으로는 가지를 쳐서 괴로움을 흩어놓았다. 모든 일은 양면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갈라지고 확장된 생각들은 어딘가에 남겨두어야 했고, 그래서 걷는 만큼이나 많은 글자들을 남겨두었다. 카페에서, 자다 깨어서, 일하는 중에도,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도 많이 글자를 적었다.
걷고 쓰다 보니,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 점차 흐려지며 닳기 시작했다. 말로는 못해도 글자로는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서야 그 생각은 더는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2011년 나를 처음 본 회사 차장님은 10년 뒤에 이런 얘기를 했다. "저렇게 세상 살기 싫은 모습으로 회사에 나오는 사람도 있구나".
『쿰란』을 다시 읽게 된 건 그 이후다. 책의 줄거리는 한 유대인 필사생이 종교와 사랑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을 겪는 내용이다. 지금 생각하면 대중적이지 않은 설정이었다. 특정 종교와 민족의 문화적 배경이 강조되었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이 책은, 젊은 시절을 지나며 겪는 고통과 혼란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구나 어느 시점에 경험하는 감정들을 종교와 문화라는 틀 속에 풀어낸 것이었다.
수천 년을 상회한 아리 코헨의 고통과 고뇌와 달리 내 괴로움은 단지 10여 년 남짓이었지만, 수천 년이든 10년이든, 괴로움은 언제나 현재에 존재한다.
아리 코헨은 히브리어로 전해지는 신의 말씀에는 ‘현재’는 없으며 오직 과거와 미래만 존재한다 했다. 그는 미래를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현재에 살고 있었다. 신의 말씀이 과거에 있든 미래에 있든, 그의 말과 글자들은 사랑하는 제인을 향했고, 그것은 고뇌로 이어졌다. 그는 제인을 사랑했던 것도, 사랑할 예정도 아니었다. 그는 제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은 현재에만 존재한다.
『쿰란』은 매년 다시 읽는다. 이 책을 읽을 때면 2011년의 괴로움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던 전년들과 달리 올 해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그 이유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 같은 순간에도 사실은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대개는 비생산적이고 비합리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들이 때로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전 글에서 ‘이제는 다정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쓴 적이 있다. 나는 모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의미의 다정한 사람도 아니다. 다정해지면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아질 것 같았고, 그래서 다정해지려다 도망쳤고, 그 결과는 더 모질고 길었다. 이거야 말로 비생산적이고 비합리적인 선택이었으면 사실, 멍청한 판단이었다.
아리 코헨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전부 같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일어나지 않은 불특정한 미래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앞세워 머뭇거리다가 결국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방식은 비슷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그의 신은 과거와 미래에만 머물지 몰라도, 그는 현재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를 온전히 알 수 없고, 미래는 더욱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이 이제는 괴롭지 않다. 어떤 일은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시간을 지나왔다. 언젠가 쓴 것처럼 이제는 다정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불확실한 미래를 온전히 기대할 수 있다.
쿰란은 총 세 편으로 구성된 시리즈다. 첫 번째는 『쿰란』, 두 번째는 『일곱 방울의 피』다. 원제는 『성전의 보물(Le Trésor du Temple)』이다. 한국어 제목도 내용상 틀리지는 않지만, 굳이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세 번째는 『최후의 부족(La Dernière Tribu)』으로,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까지 읽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상상은 때로 현실보다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