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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거리

안갯속 선명한 파리의 기억- 모디아노 1988

by 마나스타나스

미라보 다리는 파리 15구와 16구를 잇는 최초의 철교이며, 그 서쪽 단에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비가 작게 붙어 있다. 그는 마리 로랑생과의 결별을 앞두고 이 시를 썼다.


같은 도시, 같은 강가에서 수십 년이 지난 후, 또 한 명의 프랑스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잃어버림’을 말한다. 파트릭 모디아노.

우리는 쿠르 라 렌느 산책로의 풀밭을 거닐었다. 소낙비, 젖은 나뭇잎과 흙냄새, 알마 광장 반대쪽의 강둑을 따라 도쿄궁 전망대 위에서 우리는 목소리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지나 않을까 싶어서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레넬 가와 언덕 위의 정원, 센 강, 그르넬 다리까지 우리가 따라 걸어가던 백조 산책로, 그리고 파씨의 층계와 트로카데로 공원을 거쳐 오는 귀로.

1988년에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로 번역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의 원제는 Quartier perdu, 잃어버린 거리로 몇 년 전에 제목이 수정되었고, 잃어버린 거리이자, 잃어버린 조각들에 대한 주인공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과정이 소설의 줄거리이기 때문에 수정된 제목이 더 잘 맞는다.


20년 전 도망치듯 파리를 떠난 주인공이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간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올랐다. 마들렌 조각을 보다가 어린 시절의 콩브레를 회상하며 시작한 길고 긴 서사와는 다르게 모디아노는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한 시점의 기억을 추적한다. 회상이 아닌 추적.


옮긴 분인 김화영 교수가 얘기한 대로 인식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은 모디아노가 묘사하는 공간 안에서 현재와 과거로 인식된다.

모디아노 소설은 안갯속에서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뿌연 느낌이다. 그 뿌연 느낌 안에서 찾아가는 정체성의 이야기이며 결론적으로는 정체성을 찾다가 만다.


파리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다. 색유리를 낀 것인지, 바래져 버린 것인지 모르겠는 뿌연 느낌 안에서도 묘사만큼은 생생하다. 파리 거리를 헤매고 다녀본 사람이라면, 그 생생한 아름다움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미라보 다리도 그중 하나이다. 이야기가 있는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0권짜리 대작이다. 통근 버스를 기다리던 새벽에 틈틈이 읽어서 결국 1년 걸려 다 읽었다. 패딩의 나일론 모자를 뚫고 스미는 겨울바람과 그늘에 숨어도 쫓아오는 한여름 새벽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숙제처럼 읽었더니 그 내용이 잃어버린 거리처럼 머리 안에 뿌옇게 잔상으로만 남았다. 올해 다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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