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명감독이군요
알프레드 히치콕은 1899년 영국에서 태어나 1980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성영화의 시기였던 1923년작 Number 13으로 시작해 생전에 총 57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20세기를 거의 가득 채워 활동한 그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히치콕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대개 싸이코를 떠올릴 것이다. 클로즈업된 여성의 비명 장면은 말 그대로 ‘moving picture’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강렬하다. 실제로 히치콕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초반부에서 “moving picture”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기도 한다. 무성영화 시대를 거쳐온 감독다운 언어 감각이다.
히치콕의 영화 중 특히 유명한 몇몇 작품과 그 상징적인 장면들만 간간이 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영화 네 편을 연달아 보게 되었다. 그 시작은 39계단이었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흑백 유성영화로, 무성영화의 느낌이 강하게 남아 있다. 영국 작가 존 버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런던에 살고 있는 캐나다 출신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스코틀랜드까지 배후를 추적해 나가며 자신에게 씐 누명을 벗으려는 이야기다. 결말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부부탐정” 시리즈가 떠오른다. 전통적인 살인사건 중심의 추리극과는 달리, 이 시리즈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첩보물에 가까우며, 전반적으로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39계단도 비슷한 인상을 준다. 주인공 리처드 해니는 쫓기는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심지어 느긋하기까지 하다. 그런 태도는 극적 긴장감 대신 묘한 거리감을 형성한다. 여자 주인공이 리처드에 대한 오해를 푸는 장면에서는 잠시 로맨스로 전개될까 싶다가도 딱 거기서 멈춘다. 절제와 여유의 미학이 살아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스파이물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히치콕은 영국인 감독이지만, 미국에서 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구명보트는 그 대표적인 예다. U-boat에 의해 침몰한 미군 함정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하나의 구명보트에 몸을 싣는다. 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인간 본성의 다양한 면이 서스펜스로 그려진다.
“바다 한가운데 유일하게 떠 있는 구명보트 한 척” — 이 영화의 배경은 이것이 전부다. 그래서 더 스릴 있고, 더 불편하다.
9명의 미국인이 독일군 장교를 구출해 같은 보트에 태우면서 이야기의 방향은 예측할 수 없게 전개된다. 제한된 공간과 자원의 조건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불확실성과 맞닿는다. 독일군 장교는 그 불확실성을 직접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생존자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촉매 역할을 한다.
싸이코와 함께 히치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창은 관음증, 즉 타인의 삶을 엿보는 심리를 중심에 둔 영화다. 구명보트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데, 이번에는 주인공의 집과 그 맞은편 아파트들이 무대다. 피아노를 치는 작곡가, 아침마다 춤을 추는 여성, 사이가 좋지 않은 중년 부부, 히스테리컬 한 독신 여성 등, 다양한 인물들이 그 공간 안에 존재한다.
사진작가인 주인공은 다리에 깁스를 해 집밖으로 나갈 수 없다. 무료한 하루를 보내던 그는 어느 순간 이웃의 이상한 기척을 느낀다. 한 여성이 사라졌고, 그녀의 남편은 어딘가 수상해 보인다. 주인공은 살인이 벌어졌다고 확신하고, 본격적인 ‘관찰’을 시작한다.
이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형사 친구와, 그의 추리를 적극적으로 돕는 미모의 연인, 그리고 유쾌한 간호사까지. 모두가 함께 ‘탐정놀이’에 동참하게 된다. 살인을 다루고 있음에도 이 영화는 무겁지 않다. 오히려 높은 몰입감을 유지하며 관객을 이끈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중간에 쉬지 말고 끝을 봐야만 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세련된 작품이다. 영화 작법이나 촬영 기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1959년에 이 정도로 정교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전 히치콕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쫓긴다. 그런데도 그는 놀라울 만큼 여유롭고 느긋하다. 39계단의 주인공과 닮아 있다. 잘 차려입은 채 위기를 넘나드는 그 모습은 현실감과는 거리가 있지만, 영화적 맥락 안에서는 이상하게도 어울린다. 이 역시 히치콕 특유의 미학이다.
광고회사 중역인 주인공이 스파이로 오인받고 추격당하면서 사건은 전개된다. 기차에서 만난 여성은 처음엔 악당의 연인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니 그녀 역시 정부 요원이다. 둘은 몰리고 몰리다 결국 악당들을 물리치고 해피엔딩을 맞는다.
이전 영화들과 달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배경은 광활하다. 뉴욕에서 시작해 러시모어 산까지, 히치콕의 영화는 공간적으로 확장을 이어간다. 덕분에 영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스펙터클 하고, 긴박함보다는 속도감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뉴욕의 한 고층건물 꼭대기에서 지상을 촬영한 장면이며, 두 번째는 비행기가 가로지르는 인디애나주의 옥수수밭을 촬영한 장면이다 (실제로는 캘리포니아라고 한다).
이번에 감상한 히치콕의 네 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모두 <우아하고 고상하며, 기품 있고 느긋하다>는 것이다.
그가 영국인이어서 그런지, 혹은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남성다움’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성향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절박한 순간조차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심지어 총구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상대를 조롱하며 농담을 건넨다.
히치콕의 여자 주인공들 역시 눈에 띈다. 그들은 꾸며낸 듯한 기품이 아니라, 태생적인 우아함을 지닌 인물들이다. 처음에는 소극적인 전통적 여성상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남자보다 더 과감하고 진취적인 선택을 한다. 이 모순적인 결합은 오히려 현대적 여성상보다도 더 복합적이고 매력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히치콕은 그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 한가운데서, 오히려 진취적이고 해방된 인물들을 창조해 냈으며 그 인물들은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했다. 히치콕의 영화는 단지 시대를 반영한 고전이 아니라, 지금의 시선으로도 여전히 유의미하게 읽힌다.
+ 아직 그 유명한 싸이코를 보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얼굴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클로즈업 장면이 떠올라 좀처럼 이 영화를 시작할 수가 없다. 나는 호러와 스릴러에 유독 약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