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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지배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017

by 달리

인간이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된 이후 지금까지 기록 시스템은 더 많은 정보를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저장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 기록의 수단으로서 언어 또한 그런 노력들과 함께 진화했다. 그리고 이제 그 시스템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블록체인 기술이 불러온 논란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인간의 기록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수반하므로, 빈틈없는 알고리즘이 모든 중요하고 사소한 데이터를 기록하도록 만든 시스템이 바로 블록체인이다. 이는 다른 누구보다 인간들이 절실히 원했던 바로 그 기술이다. 모든 일상이 데이터 형태로 기록, 저장되고 그것이 나의 선택을 결정할 것이다.


현시점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선택, 나의 판단이라고 불리기 어려울 것이다. 모든 개인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기술적 알고리즘에 전적으로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오늘 오전에도 글을 쓰기 위해 이전에 읽은 책의 어딘가에 적힌 대목을 찾아 헤맸는데, 만약 알고리즘이 내가 읽은 모든 책을 기억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검색해서 내 눈앞에 정확히 펼쳐놓는다면 그걸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이런 기술은 이미 현실화되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즉 내 경험 데이터에 대한 접근 권한을 승인하는 대가로 '나'라는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가 체계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면, 그로부터 진정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관리할 수 있게 된다면. 개인의 자유의지와 프라이버시는 지금의 위상을 잃게 되지 않을까. 모두 기술의 혜택을 받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내던져버리지 않을까.


나의 일시적 변덕과 게으름, 본능적 욕구나 그밖에 내가 원하는 목표에 닿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감정적 요인을 제거하고 오로지 데이터에 기반하여 할 일을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이므로. 심지어 이 기술에 따르기만 한다면, 일상의 많은 고민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새해 계획을 돌이켜보자. 매번 계획표를 짜도 실천을 못했던 것은, 그 계획표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나'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마주할 알고리즘은 나의 모든 사소한 습성까지 패턴으로 파악하여 내게 최적화된 계획표를 매 순간 강력한 실천 동기와 함께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따를 것이고, 계획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사소한 것들도 모두 기록으로 남겨 자신의 영향력 안에 두고자 했던 인간의 노력과 욕망은, 역설적으로 기록에 의한 지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을 믿는 대신 정확한 데이터와 이를 처리하는 알고리즘을 믿을 것이다. 이미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앞으로 나의 행동을 가장 잘 기억하는 주체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을 근거로 자신의 성격과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미래에는 이마저도 나보다 기술적 알고리즘이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해서 사실과 다르게 재구성되고 때로 조작되기도 하니까.


결국 나에 대해서 기억도 나보다 더 잘하고, 성격분석이나 정체성 확립도 나보다 더 정확히 해내는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해 보인다. 조만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더 좋은 미래를 갖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 기술에 의지하고 기록에 의존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이미 그렇게 되었다. 사람들은 습관, 생체리듬, 각종 주기 등 극히 개인적인 정보까지도 스마트기기에 업로드하고 기계적으로 관리한다. 당연히 이런 흐름은 가속화될 것이고, 개인의 가장 본질적이고 내밀한 부분까지 깊게 관여할 것이다. 그리고 기술은 이런 흐름보다도 더 빨리 진보할 것이다. 미래에는 기술이 앞장서 사회를 견인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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