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실현되는 환상

마틴 잔드블리엣, <랜드 오브 마인Land of Mine>, 2015

by 달리

* 스포일러 : 약함



현대의 보편적 인류애를 관통하는 윤리적 기준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오늘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에 실제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선악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때로 사람들의 윤리적 기준은 감정적 호불호에 쉽게 좌우된다. 그런 경우에 정의란 그저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따르는 그 무엇이 된다. 누구나 정의를 말하지만, 그 안에 그들이 말하는 영원불변의 형이상학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꽤 오래 지속되어 고착화하면 편 가르기 싸움이 시작된다. 정의를 향한 열정은 반드시 외부의 불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다투기 시작하고, 이는 곧 두 집단 간의 극단적 대립으로 발전한다. 상대를 향한 맹목적 비난은 정의의 외피를 두르고 각 집단의 내부 결속력을 더욱 단단하게 다진다. 그들은 상대를 절대적 악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특히 이런 대립의 초창기에는) 실은 어느 쪽도 절대적 악과는 거리가 멀다.


대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 악하지 않았던 두 집단이 어떤 우연한 계기를 맞아 서로를 악한 세력으로 규정하게 되면, 실제로 두 집단 모두가 악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상대를 향한 적대감은 격한 행동을 부추기는 동력이 되고, 이 동력은 얼마간의 폭력을 허용하는 면죄부로 기능한다. 우리 편의 폭력은 상대 편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것으로 여겨지다가, 이내 정의로운 것으로 찬사 받는다. 각 세력은 오직 자기들만이 정당하고,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 또한 어느 쪽도 사실이 아니다.


이제 각 집단은 상대 세력의 불의함을 증명하기 위해 본인들의 내부 논리로 모종의 정당성을 확립한다. 이렇게 자체적으로 부여된 정당성은 언제나 자의적 폭력을 수반하는데, 적의 포로나 첩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특히 잔인하다. 심지어 무고한 사람을 적으로 몰아 극심한 폭력을 행사한 일이 역사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불의한 폭력마저도 집단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부여한 정당성에 의해 쉽게 합리화된다. 우리가 마주해왔고 지금도 마주하고 있는 거대집단 간의 대립은 거의 대부분 이런 양상을 띤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이러한 대립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1945년 5월, 전후 덴마크에서는 서해안에 매설된 150만 개의 지뢰를 해체하는 작업에 2천여 명의 독일 포로들을 동원했다. 작업 도중 숨지거나 심하게 다친 독일 포로의 대부분은 소년이었다. 덴마크의 군인들은 전쟁에 직접적 책임이 없는 어린 포로들을 지뢰 제거 작업에 동원하는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고, 덴마크의 평범한 시민들 또한 그랬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킨 나치 독일이 응당 짊어져야 할 책임이자 인과응보였다. 그 결과 독일의 아이들은 일렬로 해안에 엎드려 꼬챙이로 모래바닥을 찔러가며 지뢰를 찾아내 일일이 제거해야 했다. 이것은 정의로운 일인가.


전후 덴마크 서해안의 지뢰 해체 작업에 동원된 독일의 포로들은 대부분 어린 소년들이었다(출처 : 영화 <랜드 오브 마인>)


어떤 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죄의 예로 주저 없이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꼽을 것이다. 오늘날 독일인은 나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를 자국 역사의 수치로 여기며, 그들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일말의 변명도 허용하지 않는다. 나치의 역사를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행위는 독일을 포함한 많은 유럽 국가에서 형법 상 범죄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나치 독일의 죄 없는 소년들에 주목한다. 조국의 죄는 분명 단죄받아 마땅한 것이었으나, 그 단죄의 방식은 과연 정당했는가. 나치에 대한 감정적 분노를 벗 삼아 어린아이들의 몸둥어리를 지뢰받이로 사용한 것은, 그들이 그토록 혐오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전쟁 직후 덴마크의 평범한 시민들은 이러한 방식의 단죄를 정의롭다 여겼겠지만, 이는 분명 오늘날의 보편인권 윤리에 크게 어긋난다. 오늘날 이런 일에 '정의롭다'는 수사를 붙일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정말로 당대를 살아가는 다수 인간의 감정적 호불호에 불과한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바람 가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갈대 무리의 흔들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전쟁과 분노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은 적의 아이들을 지뢰받이로 사용하며 그것을 정의의 실현으로 여겼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정의는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까.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가 꾸준히 진보의 길을 걸어왔다고 믿지만, 우리가 정말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은 단지 정의가 실현되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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