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Dec 18. 2017

Deeds, Not Words

사라 가브론, <서프러제트Suffragette>, 2016

*스포일러 : 강함



영화 <서프러제트>는 1913년 6월 4일 수요일, 영국의 더비 경마 개최일에 일어난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Emily Wilding Davison'이라는 인물의 죽음과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당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며 거리에서 투쟁하던 시민단체 '서프러제트Suffragette'의 일원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에밀리의 죽음을 결론부에 배치하며 가장 극적으로 연출해내면서도, 인물 자체의 내러티브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에밀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에밀리(나탈리 프레스Natalie Press)가 극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말에서 그녀의 죽음이 갖는 무게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수준이다.


영화는 1912년 영국 런던의 어느 세탁공장에서 시작한다. 24살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Carey Mulligan)는 글래스하우스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성실하고 순종적인 노동자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동료 바이올렛(앤 마리 더프Anne-Marie Duff)이 서프러제트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들의 과격한 활동 방식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바쁘고 고된 일상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모드로서는 그들의 대의가 그저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모드와 바이올렛이 근무하는 세탁공장의 공장주 테일러(제프 벨Geoff Bell)는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철저히 계산된 합리성이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남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실천하지만, 은밀한 곳에서는 어린 여성 노동자를 성추행하는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모드는 어릴 적 자신에게 하던 짓을 바이올렛의 딸 매기에게 똑같이 저지르는 테일러를 보고 여성운동에 동참할 이유와 당위를 깨닫는다.


7살부터 글래스하우스 세탁소에서 일해온 모드는 여성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증언하고자 의회에 참석한다. 의장 로이드 조지가 묻는다.

"와츠 부인에게 투표권이란 무엇입니까?"
"생각을 안 해봐서 무슨 의미일지 모르겠어요."


자리를 메운 신사들의 조롱 섞인 웃음이 어두운 의회를 채운다. 로이드 조지가 다시 묻는다.


"그럼 왜 여기에 왔습니까?"
"우리에게도 뭔가 또 다른 인생이 있을 거란 생각 때문에요."


우리는 주어진 삶에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길이 언제나 최선이라 믿는다. 주어진 조건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최선이다. 정말 그럴까.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진보라는 것이 약자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우리 삶에 고정적으로 주어졌다고 믿었던 그 조건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뭔가, 완전히 다른 인생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정말 터무니없는 상상에 불과한 걸까.


물론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다. 모드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의 증언으로 일그러진 현실이 공식적으로 폭로되었음에도,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진 국회는 여성 투표권을 부결시키고 만다. 정부는 여성의 비참한 삶을 몰랐던 게 아니라, 알고도 외면한 것이었다. 희망에 부풀어 찾아간 광장에서 기대와 다른 답변을 듣게 되자 여성들은 격분하고 군중은 시위대로 돌변한다. 모드와 바이올렛은 그 자리에서 무책임한 내각을 규탄하다 체포되어 일주일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체포와 구금은 서프러제트에겐 흔한 일이지만 모드에겐 낯선 경험이다. 모드는 난생처음 겪는 구속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모드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옳은 일을 하는 대가로 그동안 소중히 여겨온 모든 것들이 희생되어야 하는 현실에 있다. 짧은 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모드의 일상은 전과 같지 않다. 이웃들은 수군거리고, 일터에선 조롱에 시달려야 한다.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던 남편의 반응도 냉담하기만 하다. 모드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다시는 그런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 약속하지만, 한 번 보게 된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은 다시금 그녀를 집회로 향하게 한다.


이번 집회에 연사로 등장한 인물은 그 유명한 서프러제트의 수장, 에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Meryl Streep)다. 말이 아닌 행동이 변화를 가져온다며 억압받는 여성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장본인이다. 당시 영국 여성운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녀는 자연히 경찰에게 요주인물로 파악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 모드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팽크허스트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또다시 붙잡히고 만다.


모드는 이 일로 남편으로부터 쫓겨나고, 아들 조지와도 떨어져 지내게 된다. 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할 법 권리는 남편인 소니 와츠(벤 휘쇼Ben Whishaw)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 국회에서 증언하고 집회에 몇 차례 참석한 일은, 순응적인 삶을 살 때 그녀가 누릴 수 있었던 소박한 행복을 모두 파괴하기에 부족함 없는 명분을 제공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온건히, 합리적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요구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온건한 모드를 단호한 여성운동가로 만드는 요인은 주위 동료들도 아니고 팽크허스트라는 훌륭한 선동가도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이 조금이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려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20세기 초 영국의 기울어진 현실에 있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방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과격한 작전을 세운다. 이때 그들이 세운 계획이 런던의 우체통과 전화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정부와 남자들에 맞서 그들의 기간통신망을 차단하기로 한 것은 상징적으로 매우 영민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언론에 의해 폭탄테러 등 범죄 행위로만 묘사되자 이들은 결국 완공되지 않은 수상의 별장을 불태우기로 하고 실행에 옮긴다.


영화는 옳은 길을 걷는 선택이 얼마나 많은 현실적 제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지 훌륭하게 묘사했다. 극 중 모드 와츠는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극히 당연한 권리를 요구했음에도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바이올렛은 열성적인 활동가였음에도 임신을 하게 되자 과격한 작전에 동참할 수 없다고 말하며 눈물 흘린다. 이디스 엘린 부인(헬레나 본햄 카터Helena Bonham Carter)은 공격적 활동으로 체포와 구금을 겪을 때마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더비 경마 개최일 작전에 합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드물게 등장한 에밀리 데이비슨 역시 갖가지 현실적 제약에 부딪히며 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세상을 바꾸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익숙한 사회의 모순은 이처럼 무지막지한 현실적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존재에 대한 뜨거운 찬가이다. 그들은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분투했다. 당시 사회가 노골적으로 강요한 노예의 정체성을 끊어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부르짖은 그들의 드높은 이상은 영국을 넘어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위업으로 남았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성운동에 대한 발전적인 논쟁들은 모두, 절실한 투쟁으로 자기 존재를 알린 이들 서프러제트에게 일정한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늘 주장하던 그대로,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는 말이 아닌 행동에 의해 일어나며,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 의무는, 오늘날 합당한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있다.


출처 : 영화 <서프러제트>


매거진의 이전글 선택과 책임에 대한 묵직한 교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