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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18. 2017

전쟁과 평화의 메커니즘

켄 폴릿, 『거인들의 몰락Fall of Giants』, 2015

전쟁의 명분은 언제나 평화와 정의에 있다. 이 명분에 일말의 진실(혹은 그에 다가가려는 최소한의 의지)이라도 담겨있다면, 구체제가 지닌 온갖 악을 일거에 타파하고 그 위에 새롭게 지어지는 세계는 적어도 이전보다 찬란한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와 같은 명제는 의심스럽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의 물리적 속성보다 더욱 심각하게 손상되는 것은 언제나 인간 삶의 내면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 무작위로 내던져진 삶의 내밀한 단면들은, 물리적 세계가 완벽히 제자리를 찾은 뒤에도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본인이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한 정의로운 세계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 지불된 비용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무고한 인간의 삶을 수단 삼아 이룰 수 있는 인류애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 또한 보편적 정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의 명분에 현실적 힘을 실어주는 증거도 명백히 존재한다. 그 증거들은 우선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가치의 존재를 상정한다. 역사의 진보, 그리고 새로운 질서가 가져다 줄 평화에 대한 진지한 믿음 없이 그토록 수많은 삶들을 전쟁에 자발적으로 뛰어들게 만들 수는 없다. 삶을 향한 생물의 본능적 욕구가 국가 혹은 어떤 추상적이면서도 고귀한 가치를 향한 사명감으로 전환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지 않는다. 그들 모두 평화와 진보(정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진지하게 신봉하는 바로 그 가치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전쟁에 종사한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 바쳐 전쟁에 나선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역으로 무엇보다도 강력한 명분을 제공한다. 이 과정을 한 차례 거치고 나면 평화와 보편적 정의, 진보적 가치는 뚜렷이 실존하는 무엇이 되고야 만다.


켄 폴릿Ken Follett의 소설 거인들의 몰락은 복잡해 보이는 전쟁과 평화의 메커니즘을 평범한 인민(people)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쉽게 묘사한다. 소설 속 주요 사건들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유럽에서 벌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묵직한 역사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으레 그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 지식들이 과거 그 시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입체적으로 재현되어 새롭게 전해져 온다. 건조하게 나열된 역사적 사실 속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던 당시 사람들의 '개별적 삶'이 눈에 들어온다. 전쟁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각자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에까지 이르는지, 그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무늬를 손으로 만지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마치 역사의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열성적으로 변론하는 듯한 등장인물의 견해를 통해, 서로 다른 관점을 저울질해보는 즐거움도 각별하다.


소설 속 제목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영국과 독일, 러시아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좁은 섬을 벗어나 세계를 식민지로 물들이며 거대한 제국을 형성해 나가던 영국, 특유의 합리적 태도와 근면함을 바탕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독일, 차르의 독재를 기반으로 오랜 시간 견고한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러시아가 전쟁을 전후로 하여 어떤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제국주의의 저변에 깔려있던 인식, 즉 인민들의 세계관이 전복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전쟁 전에는 결코 허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계급 사회(혹은 일련의 전통적 규범들)의 단단한 벽이 마른 모래더미처럼 바스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의 삶과 인식이 갖는 힘을 절감할 수 있다.


소설 <거인들의 몰락>이 갖는 큰 장점은 거인들의 파워게임과, 그로 인해 달라지는 사회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논리적으로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영국의 건장한 청년 남성들이 프랑스의 전선으로 떠나면서 남겨진 여성들의 노동이 불가피해지고, 이 노동은 일종의 후방지원 성격을 갖게 된다. 조국의 전쟁을 함께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자각한 영국의 여성들은 전쟁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위해 선거권을 쟁취하고자 분투한다. 결국 이들은 젠더 권력을 독점한 남성 기득권에 대항하여 제한적으로 선거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각국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벌이는 전쟁과, 국내 정치에서 권력을 놓고 벌이는 갈등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유기적으로 엇갈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동적으로 묘사된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 역동성을 가장 치밀하게 반영하는 인물은 역시 귀족 가문 출신의 '모드 피츠허버트'와 광부의 딸 '에설 윌리엄스'다. 소설 속에서 그 상징적 기능이 단연 돋보이는 두 인물의 전쟁 전과 후의 일상을 비교해보면, 이 거대한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런던 사교계에서 거물들과 만찬을 즐기던 모드는 전쟁 후 베를린의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술에 취한 남자들의 추파를 견디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간다. 웨일스 애버로언에 위치한 백작의 저택에서 하녀장으로 근무하다 백작의 아이를 임신하고 쫓겨났던 에설은 전쟁 후 유명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영국의 하원의원으로서 살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세계를 바꾼 동력은 표면적으로 거인들의 전쟁에 있는 듯하나, 그보다는 전쟁이 가져온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관의 전복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소설 거인들의 몰락은 섬세한 논리로 무장하면서도 현실적 요소를 군데군데 가미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으로 독재자 차르가 물러나고 소비에트와 붉은 군대가 실권을 장악하지만, 그들의 드높은 이상이나 고상한 이론과는 달리 또다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발생하는 메커니즘 속에는 익숙한 현실의 지독한 모순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에설의 남편이자 열렬한 사회주의자인 버니가 정작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거리낌 없이 아내를 희생시키려 하는 모습에도 어두운 현실의 단면이 녹아있다. 이렇듯 현실적인 요소는 비단 역사 속의 일만은 아니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소설은 우리가 희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무책임하게 그려내기보다 우리가 두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사회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흘러왔으며 또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안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개별적 삶을 관통하는 동시에 다음 세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연속성을 지닌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소설 속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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