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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12. 2017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올바른 자세

김현석, <아이 캔 스피크>, 2017

* 스포일러 : 약함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얼마간 불편한 요소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 불편한 요소는 단순한 일상의 파편일 수도 있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역사 속 진실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이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면, 불편한 것들과 직면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들과 직면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우리가 그동안 외면했던 것들과 마주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모두가 알면서도 똑바로 마주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참혹한 역사를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두고 묵혀온 감정을, 분노와 한풀이가 아닌 공감의 눈물로 풀어냈다. 특히 위안부의 참상을 고발하고자 문학적 수단을 동원할 때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극도의 사실적인 묘사가 이 영화에서는 매우 절제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폭력적 상황의 묘사를 의도적으로 최대한 배제한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그러면서도 매우 책임 있는 스토리라인을 전개해나간다.


사실 그동안에는 아픈 역사나 부조리한 현실을 다룬 작품이 일종의 포르노그라피로 소비되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아 직면하게 하려는 본래의 의도와 맞지 않게 역효과를 본 경우가 많았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그런 역효과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도 사안을 다루는 진중한 자세를 놓지 않은 수작이다. 이제 이런 장르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은 폭력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만이 문제를 직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아이 캔 스피크>에 반가움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다.


일제강점기에 위안소에 끌려가 성을 착취당한 과거를 지닌 나옥분(나문희)은 해방 이후에도 그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야 했다. 온갖 고초를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여기고 감추도록 강요한 세력은 다름 아닌 해방된 조국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옥분과 정서적으로 가장 친밀했을 옥분의 어머니가 그런 침묵을 강요한 주범이었던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즉 광복 직후 위안부의 존재를 우리나라의 역사적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한 사람들은 특별히 악랄하거나 비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마, 아빠, 형제, 자매, 이모, 삼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진심으로 피해자를 걱정했고, 또한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걱정했다. 영화 중반,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드러내지 말라고만 하지 말고, 욕봤다고 한 번 보듬어 안아주기라도 하지 그랬냐'며 통곡하는 할머니 나옥분의 모습은 그래서 더 서럽다. 오랜 세월 동안 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영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래도록 계속해온 옥분의 외로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물음 또한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는 그들 피해자를 상대로 또 다른 가해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끔찍하도록 불편한 진실 앞에서 뒷걸음질하거나, 못 본 척 돌아서지는 않았는가. 그들의 처절한 목소리를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일제강점기 위안부가 겪은 참상, 그리고 해방된 조국에서 겪은 멸시와 모독의 역사는 어슐러 르 귄의 유명한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속의 행복한 도시 오멜라스를 떠오르게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오멜라스는 사실 지독한 패러독스를 안고 있다.


'오멜라스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공공건물 지하실에, 어쩌면 대궐 같은 개인 저택 천장에 방이 하나 있다. 방문은 잠겼고, 창문은 없다. 이 방에 아이가 하나 앉아 있다. 지능도 떨어지고 영양 상태도 안 좋은 아이는 방치된 채로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간다. 사람들은,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은, 아이가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 (……) 그들은 모두 아이가 거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들의 행복이, 도시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따뜻한 우정이, 자식들의 건강이, (……) 심지어는 풍요로운 수확과 온화한 날씨까지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끔찍한 불행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 아이가 그 비참한 곳에서 나와 햇빛을 본다면,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위로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날 그 시간부터 오멜라스의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기쁨은 시들고 파괴될 것이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2010, p63에 인용된 부분을 재인용


이것은 우리 사회가 위안부 여성을 대했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의 존재와 피해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은, 다 함께 문제를 직면하고 위로하는 길 대신 저마다 조금씩 문제를 나누어 은폐・축소하는 길을 걸어왔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흠잡을 데 없이 근면 성실했던 그 선량한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위안부의 역사를 '앞장서' 부끄러워했으며,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과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피해 당사국의 이런 자기혐오 논리는 가해국의 당황스러울 정도로 뻔뻔한 태도와 맞물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끊임없는 증언으로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지닌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적당히 우회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한 사회를 지탱하는 정의감의 원천이 실은 얼마나 빈약하고 알량한 자존심 위에 서있을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폭로한다.


어떤 불편함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못 본 척하거나 우회하는 것보다 명백히 월등한 전략은 다름 아닌 똑바로 마주 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뚜렷한 의지의 표명이다.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거나,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합리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윤리적 고민을 바탕으로 사회의 규범을 새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눈앞에 닥친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기적 해결책보다 중장기적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며, 종국에는 한 사회가 공유하는 거대한 가치 체계의 개선이 요구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금 당장 해결방안을 내놓으라 요구할 수 없다. 사과와 반성, 화해와 용서는 앞으로 셀 수 없는 날동안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상처와 그 상처가 아문 자리에 남은 흉터는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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