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리틀 포레스트>, 2018
* 스포일러 : 중간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참신하지만 놀라움보다는 편안함을 선사한다. 스토리텔링은 주로 인물 간 대화나 주인공 혜원(김태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담담하게 전개되는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장치가 추가된다. 바로 음식과 계절이다.
계절을 따라 극의 줄거리(또는 에피소드)를 진행하는 연출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음식과 함께 흘러가는 전개는 다소 낯설다. 혜원은 겨울에 배추전을 곁들인 수제비를 혼자서 먹고, 봄에는 잘 어울리는 재료들로 만든 팥시루떡을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다. 어린 혜원이 학교에서 따돌림당해 속상할 때 엄마(문소리)가 만들어주었던 달달한 크림 브륄레는 토라진 은숙(진기주)의 마음을 녹이기에도 제격이었고, 혜원이 직접 발효시켜 만든 막걸리는 오래 묵은 고향 친구들과 함께 마시며 회포를 풀기에 부족함이 없다. 직장 상사에게 한 방 먹인 친구 은숙과는 입이 얼얼하게 매운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다. 떠난 엄마와 나눴던 대화는 둘이 같이 먹었던 토마토와 함께 회상한다. 아빠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엄마는 거의 다 먹은 토마토를 밭에 던지며 말했었다. 저렇게 막 던져도 결국엔 자라나 열매를 맺는다고. 그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었음을, 혜원은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다 깨닫는다. 이렇듯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정서는 음식, 계절과 조화를 이루며 조용하게 흘러간다. 그중 어느 한 부분도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어떤 '삶의 깊이'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높이 솟은 삶들만을 동경하며 바쁘게 보내온 날들 속에서 놓치고 말았던 삶의 깊이. 이 깊이가 관객들을 영화 속 인물들의 삶으로 끌어당긴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소탈하고, 계절은 무던하며, 음식은 담백하다. 이들은 조화롭게 공존하며 시골 마을의 정서에 깊이를 더한다. 밤조림이 맛있는 것은 가을이 깊어가는 증거고, 곶감이 맛있는 것은 겨울이 깊어가는 증거다. 그렇게 깊어가는 계절 속에서 주인공 혜원의 갈 곳 잃었던 마음도 차분히 정리된다. 우리도 마찬가지. 기다려야 진짜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거라는 혜원 엄마의 말을 따라, 우리는 기다림의 철학과 느림의 미학을 배운다. 영화가 끝날 무렵 관객들은 어느 고즈넉한 초야의 시골집에서 정갈하게 차려 나온 소반을 대접받은 것 같은 기분에 잠긴다.
한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의 고향인 시골 마을은 화사하고 낭만적이다. 해마다 포근한 봄, 싱그러운 여름, 정겨운 가을, 단아한 겨울이 지나가는 농촌. 시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름마저도 농촌의 깊어가는 계절을 음미할 수 있게끔 적시적기에 찾아온다. 물론 극에서만 가능한 설정이다. 실제 농촌은 이 영화에서 그려내듯 그리 서정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다시 말해 영화는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한가로운 전원생활의 가장 미화된 형태로서, 현실에 발 담그고 있지만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영화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든 작위적 서사들은 얼마간 위선적이거나 위악적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현실보다 과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농촌 판타지가 농사의 고된 현장을 담아내지 않았다고 해서 특히 위선적이라 평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끝으로 배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이 영화는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인물이 배우를 찾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훌륭한 캐스팅을 선보인다.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을 연기하는 배우를 찾아가 그대로 겹쳐지며 녹아든다. 심지어 오구 역할을 맡은 강아지 '오구'와 성견 '진원'까지도 그렇다. 특히 배우 김태리의 천진한 웃음과 거짓 없는 감정, 그리고 멍한 듯 슬픈 눈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때로 청초하고 때로 천치 같은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는 영화다.
덧붙임
이 영화가 너무 좋아 두 번을 연달아 본 여친님께서는 김태리뿐 아니라 류준열과 진기주에게서도 그 못지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사실 나도 그렇다. 혜원과 은숙과 재하 세 친구의 깨알 같은 에피소드, 그리고 김태리와 진기주와 류준열의 풋풋하고 익살스러운 연기 때문에 관람 내내 잔잔히 흐뭇했다. 이들의 케미를 또 다른 영화에서 색다른 조합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