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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삶, 낯선 세계관

이창동, <버닝>, 2018

by 달리

* 스포일러 : 강함




영화 초반, 해미(전종서)는 종수(유아인)에게 귤을 까먹는 팬터마임을 보여주며 말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진짜 귤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이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는 해미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로 그녀를 느끼며 사정한다. 이 두 장면을 통해, 영화 <버닝>은 있음과 없음에 관한 다소 몽환적인 견해를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무의식(망각)은 의식(실재)보다 강력하며, 이는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지배하는 전제로 기능한다.


해미와 종수는 각자 제 할 일을 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먼저 알아본 사람은 해미였다. 거침없는 해미는 자신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 있을 동안 자기 집 고양이 밥을 챙겨달라고 종수에게 부탁하고 그를 집으로 데려간다. 종수는 해미의 집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성관계를 갖는다. 이 성관계는 극 중 서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종수가 하룻밤 단꿈을 꾸듯 경험한 이 쾌락이 이후에는 닿지 못할 행복으로 묘사되는 데에 있다. 해미는 종수에게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다. 이창동 감독이 이 영화를 '청춘의 분노'와 연결지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의 삶과 도무지 연이 닿지 않는 행복을 추구하다가 자연스레 분노에 이른 경험. 오늘날 수많은 청춘들이 흔히 겪는 트라우마가 아닌가. 그런 청춘들이 선택하는 해법이라는 것 역시, 행복의 존재를 믿기보다는 행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어야 했다.


해미가 여행을 떠난 후 종수는 매일같이 해미의 집에 찾아와 고양이 밥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보름째 밥을 챙겨주는 동안 종수가 한 번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미는 고양이가 자폐증을 앓고 있어 낯선 사람이 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고양이는 정말 존재하는 걸까. 그러나 종수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종수가 고양이 밥을 주는 행위, 그를 통해 해미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있다고 믿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그것이 철저히 무의미한 작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하는 일이 실제 추구하는 목적과 전혀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의식보다 강력한 무의식, 결국 나는 이것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낯선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영화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인물을 통해 종수의 트라우마를 매우 적나라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해미는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서 벤을 만났다고 했다. 젊고 부유한 벤은 종수의 열등감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두 인물은 처음부터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강남의 고급 빌라에 혼자 살며 포르셰를 모는 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물류업계 일용직 노동자인 종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벤은 해미와 종수를 집으로 초대한다. 벤의 요리는 훌륭하다. 벤은 자신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뭐든 원하는 대로 만들고, 또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에게 바치는 제물이라 표현하면서, 여기에서 제물은 '메타포'일 뿐이라고 말한다(요리-제물).


다음 장면에서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시골집에 찾아간다. 종수는 이들을 초대한 적이 없다. 셋은 종수의 집 앞마당에 앉아 어둑해질 때까지 함께 술을 마신다. 벤이 가져온 대마초를 나눠 피운 다음 해미는 혼자 춤을 추다 잠들고, 벤과 종수는 단둘이 대화를 나눈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쯤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자신의 아스트랄한 취미를 고백하고,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한다. 가질 수 없는 해미를 바라는 종수의 마음은 벤을 향한 분노로 얼룩진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좇다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혀 절규하는 위태로운 청춘들처럼. 벤의 괴이한 취미는 앞서 소개된 요리-제물의 경우처럼 단순한 은유일까, 아니면 실제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물리적 행위를 의미할까. 어느 경우든 종수는 벤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는다. 설상가상 벤은 종수의 집 아주 가까운 곳에 태울만한 비닐하우스를 정해두었다고 말한다. 그날부터 종수는 집 주변의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체크하고 벤을 감시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그 와중에 해미는 연락도 안 되고 집에도 없다. 해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간 종수에게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고 말한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는 날은 해미가 사라진 시기와 얼추 겹치는 듯하다. 불에 타 사라지기만을 기다린다는 비닐하우스는 찾아주는 이 하나 없는 해미 같은 사람을 겨냥한 은유였을까(버려진 비닐하우스-버림받은 사람).


사실 해미와 관련된 에피소드 중 오해의 소지 없이 확실하게 설명되는 서사는 별로 없다. 해미의 고양이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어릴 적 해미가 살았던 집 옆에 정말로 우물이 있었는지, 해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데에 벤이 관련되어 있는지, 해미가 죽었는지, 심지어 해미가 실제로 나이로비 공항에 갔었는지까지 확실히 어느 한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벤의 말에 따르면 해미는 처음부터 혼자 여행을 갈 정도의 여윳돈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말의 진위여부마저도 확실치 않다. 그만큼 영화 <버닝> 속 세계관은 어지럽게 파편화되어 있다. 여러 영화적 암시나 뉘앙스를 통해 드러나는 바, 해미를 살해한 혐의를 벤에게 적용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임에도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다. 이를테면 해미는 그저 혼자 멀리 여행을 떠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실상은 극도로 단순할 수도 있고, 극도로 복잡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인상을 매우 낯설면서도 돋보이게 만드는 핵심 장치이다. 영화 <버닝>은 인물뿐 아니라 관객들마저도 극 중 내러티브에 대해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도록 연출되었다. 우리는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강도 높은 불안의 정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낄 뿐,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불안의 정서를 증폭시켜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캐릭터가 바로 주인공 종수다. 종수는 시종 불안한 시선과 발성, 불분명한 발음,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과 절뚝이는 듯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일관한다. 영화의 전체적 뉘앙스를 한 인물 안에 이토록 함축적으로 녹여내기란,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만큼 종수를 연기하는 배우 유아인의 모습은 영화 <버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불안하고, 부자연스러우며, 몽환적이고, 편집증적이다. 이런 이질감으로 스크린을 압도할 수 있는 배우는 분명 흔치 않다.


그밖에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해미가 종수의 집 마당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로 춤을 추는 장면이다. 폐업 세일 중인 매장 앞에서 무기력하게 같은 춤을 반복하거나 칼라하리 사막 원시부족의 우스꽝스러운 춤을 흉내 내던 때와 달리, 이 장면에서 해미의 춤은 그 어느 때보다 우아하고 고혹적이다. 저물어가는 해를 마주 보고 춤을 추는 해미의 모습은, 등 뒤에서 촬영하는 카메라 앵글에 의해 선명한 실루엣으로 표현된다. 관객들은 초점을 잃은 어슴푸레한 노을빛과 극명히 분리되는 해미의 몸짓과 실루엣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꺼져가는 명과 칠흑 직전의 암의 대비. 그 예술적인 조화에 힘입어,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해미의 춤사위는 조금도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아가 긴 러닝타임에도 지루할 틈 없는 서스펜스를 성공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던 요인에, 배우 전종서가 가진 묘한 흡인력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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