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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보금자리

자비에 르그랑,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7

by 달리

* 스포일러 : 중간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현대 국가의 정교한 법과 제도, 그 안에 내포된 합리적 인권 윤리가 개인에게 감당하기 힘든 공포로 들이닥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는 11살 소년 줄리앙(토마 지오리아Thomas Gioria)의 양육권 소송 심리 장면으로 시작된다. 어머니 미리암(레아 드루케Lea Drucker)은 아버지 앙투안(드니 메노셰Denis Menochet)의 폭력성에 아이들을 무방비로 노출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앙투안의 폭력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딸 조세핀(마틸드 오느뵈Mathilde Auneveux)이 중학생 시절 보건실에서 뗀 확인서 정도로 다소 빈약하다. 이에 대해 앙투안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며, 일방의 주장에 따라 아이에 대한 친권을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 가족에서 일어난 내막을 전혀 모른 채로 논쟁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영화 시작부터 무거운 판단을 요구받는다.


미리암과 앙투안(출처 :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송은 앙투안의 승리로 끝나고, 두 사람은 미성년자인 아들 줄리앙의 양육권을 나누어 갖게 된다. 이혼한 부부가 양육권을 나누어갖는다는 것이 아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중요한 사회적 논제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영화의 관심은 아이가 아니라, 양육권을 둘러싼 소송의 당사자 중 한 명인 앙투안이 이 권리를 이용하여 무슨 일까지 벌일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앙투안의 집요하고 비열한 폭력은 관객들로 하여금 숨 막히는 초조함과 낯설지 않은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앙투안에게 매인 줄리앙(출처 :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송에서 이긴 앙투안은 격주로 줄리앙을 데려갈 수 있게 된다. 법원에서 철저하게 숨겨진 앙투안의 폭력성을 줄리앙은 모두 알고 있다. 앙투안을 몹시 두려워하고 위축되면서도 그가 휘두르는 폭력에 조금도 놀라지 않는 줄리앙의 태도에서 그런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앙투안은 줄리앙에 대한 양육권을 무기로 삼아 부인 미리암에게 접근하려 한다. 줄리앙도 자신이 미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노골적으로 앙투안을 적대한다. 둘의 관계에서 앙투안은 때로 부드럽고 때로 거칠지만, 줄리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협조로 일관한다. 이들 부자가 함께 탄 낡은 승합차에서 수차례 울리는 벨트 미착용 경고음은 둘의 위태로운 관계를 매우 효과적으로 암시한다.


팽팽하게 흐르던 영화의 서스펜스는 후반부에서 폭발한다. 줄리앙을 이용해 미리암의 거처와 일정을 알아낸 앙투안은 끝내 그녀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하기에 이르고, 더 나빠질 것도 없어 보이던 그들의 관계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영화는 이렇듯 시민사회의 선량한 일원으로서 자녀의 양육권을 인정받은 앙투안이 단 몇 주만에 그 권리를 이용하여 얼마나 파괴적인 범죄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지 낱낱이, 사실적으로 고발한다. 이 세상의 수많은 미리암과 줄리앙들에게, 현대 사회에서 규정하는 '가족'이란 테두리는 조금도 안전하지 않다. 그들에게 가족은, 가장 위험하면서도 끝까지 벗어날 수 없는 잔혹한 보금자리다.


미리암과 줄리앙에게 '가족'이란 가장 위험한 보금자리다.(출처 :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편 이 영화의 한국판 제목이나 포스터는 내러티브의 핵심을 비껴간 느낌이다. 프랑스어 원제 <Jusqu'a La Garde>의 핵심 의미는 '양육권'이고, 실은 그것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한국판 제목과 국내용 포스터의 의도 역시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굴레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이미지로 구체화되긴 했지만 영화의 전체 뉘앙스로 볼 때 개연성이 한참 떨어진다. 줄리앙은 자신에게 덧씌워진 불행한 가족의 굴레를 스스로 피하거나 벗어던질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원작 포스터 속 무기력한 뒷모습이 이 영화에 투영된 줄리앙의 이미지에 훨씬 적확하게 포개어진다.


이 영화의 한국판 포스터와 원작 포스터(출처 :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부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원작 포스터의 디자인이 매우 영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의 전체 뉘앙스를 한 컷의 이미지에 녹여내는 본연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리암은 아들 줄리앙을 보고 있지만, 그녀의 흐릿한 눈빛이 암시하는 바 그녀는 전 남편 앙투안의 집착을 힘겹게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양육권을 둘러싼 소송에서 앙투안의 진짜 타깃은 전 부인 미리암이었고, 미리암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시시각각 덮쳐오는 앙투안의 위협에서 현실적으로 벗어날 방법이 없는 미리암은 그저 그 공포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위협적인 스토킹과 비참한 외면의 과정 사이에 낀 어린 줄리앙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한국판 영화 포스터는 이런 일련의 스토리텔링에서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한 장면을 피상적으로 포착하여 결과적으론 영화의 전체 뉘앙스와 한참 멀어져 버렸다. 이는 아마도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충분히 강조하여 대중적 흥행을 노린 구성이었을 것이나, 영화를 다 보고 나온 관객들은 한 가지 의문을 감출 수 없다. '도대체 뭐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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