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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인간에 대한 믿음

이경섭, <여중생 A>, 2018

by 달리

* 스포일러 : 중간



주인공 미래(김환희)는 학교 옥상에서 추락했다. 이 사건을 다룬 짤막한 신문 기사에서 미래는 '여중생 A'로 명명되었다. 미래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사건이 잿빛 종이 위 몇 마디 건조한 문장으로 서술되고, 수많은 사람에게 '여중생 A의 투신'으로 완결되는 과정은 흠없이 매끄럽다. 관객들은 자문한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A를 이런 식으로 소비해왔던 걸까.


영화 <여중생 A>는 바로 그 수많은 A 중 한 사람의 시선에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번 A의 역할은 미래가 맡았다. 미래는 글쓰기와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편견이다. 영화 초반, 관객이 보는 미래는 분명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미래 자신의 눈에는 한없이 초라하고 어색하다. 영화 <여중생 A>에서는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보다 스스로 규정한 미래의 모습이 훨씬 더 중요하다. 타인의 시선이란 결국 신문기사 속 'A'를 느긋하게 훑어보던 그 무미건조한 눈 들일뿐이다. 결국 영화의 뉘앙스나 내러티브가 극적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미래 본인의 시선(자아상)이다.


영화 초반 미래에게 다가가는 백합(정다빈)과 태양(유재상)은 매사 위축된 미래에게 얼마간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백합은 반장이고, 성적도 뛰어나고, 인기도 많다. 태양은 미래의 짝사랑이다. 백합이 남몰래 속삭이는 격려의 말들과 태양이 베푸는 친절은 미래를 들뜨게 한다. 미래는 조금씩 희망을 품는다. 그 희망이란 다름 아닌 '자존감'이다. 미래의 자존감은 백합과 태양의 호의에 뿌리를 두고 출발했기 때문에 다분히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극이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위태로웠던 미래의 자아상은 완전히 무너지는데, 그 발단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는 그다지 악역이라 할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제자리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그럼에도 미래와 같은 심각한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슬픈 일이지만,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 씌울 수는 없다. 백합과 태양이 저지른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화살이 되어 미래의 마음을 찔렀고, 어떤 위로도 그 상처를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백합과 태양을 보면서도 비슷한 연민을 느낀다. 왜 이들 소년의 삶은 통 마음처럼 되지 않을까.


영화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재희(김준면, 수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 사건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만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학교폭력 사안의 엄중함에 비추어 너무 안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쩌겠는가. 가해자의 마음에도 상처는 남아있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믿어야 우리는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화해란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니던가.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또한 명확하다. 미래의 말에 단서가 있다. "내 이야기에선 아무도 다치지 않아." 누군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되면 오해를 풀거나 화해를 시도할 수 없게 된다. 러닝타임에 묶일 수밖에 없는 영화를 매개로 삼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결국 이 이야기가 일종의 동화적 장치를 통해 미래를 구하면서 고조된 위기를 급히 해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데 충분한 비중을 할애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물이 지나치게 도식화된 점은 매우 아쉽다. 이를테면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대체로 학교폭력의 직간접적 가해자이면서 또 다른 압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회적 희생양처럼 보이는데, 이런 측면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충분히 입체적일 수 있는 인물들도 희미하게 바래지고 말았다. 영화 <여중생 A> 속에서 미래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종의 영화적 장치로만 기능할 뿐 뚜렷한 색깔을 지니지 못한다.


그 밖에도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의 특수성이나 청소년 문화와 관련된 디테일에서 충분히 신중하지 못했던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이 영화가 선생님을 묘사하는 방식은 조롱이나 야유에 가까운데, 이에 대한 개연성이 두드러지지 않은 점은 비윤리적이다. 그것이 비록 영화의 전체적 흐름과 메시지에 비추어 크게 어긋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확대하거나 드러내어 강조하는 일에 작자의 정치적 취향이 배어들지 않기는 어렵다. 어떤 현실의 단면을 포착하여 극화하는 일에 보다 엄격한 창작 윤리가 요구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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