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히로야스, <펭귄 하이웨이>, 2018
* 스포일러 : 약함
영화 <펭귄 하이웨이>의 설정은 사뭇 철학적이고, 군데군데 보이는 아이디어의 기발함은 지적이며 미학적이다. '펭귄 하이웨이'는 펭귄이 바다에서 육지로 가는 길을 뜻한다. 치과 누나를 짝사랑하는 11살 소년 아오야마는 어느 날 마을 한복판에 나타난 펭귄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다. 아오야마의 연구대상은 비단 특별한 사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보다 알아가야 할 것이 더 많은 소년에게, 주변은 온통 연구할 것들로 차고 넘친다. 그중 펭귄의 출현은 단연 돋보이는 사건이다. 아오야마는 주저 없이 '펭귄 하이웨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이내 좋아하는 누나가 이 기이한 현상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펭귄'과 '누나'는 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펭귄은 단순한 탐구 대상을 넘어 탐구의 의미 그 자체이고, 누나는 주인공 소년의 성장의 동력이자 이유이다. 영화는 여기에다 '바다'라는 흥미로운 장치를 더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전설을 가진 숲의 안쪽 정원에는 구 모양의 형상이 신기루처럼 공중에 떠있는데, 이를 처음 발견한 하마모토(아오야마의 친구)가 '바다'라 이름 지었다. 바다는 형태(구체) 면에서든 기능(현실과 세계의 끝을 연결하는) 면에서든, 영화 <인터스텔라>의 웜홀을 닮았다. 이것이 이 영화의 장르적 인상을 치밀한 SF로 보이게끔 만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가볍고 산뜻하다.
아오야마의 아버지가 주머니 비유(주머니에 세계를 담는 방법은 주머니를 뒤집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를 통해 적절히 표현했듯, 구체 모양의 '바다'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 난 구멍이다. 겉으로는 정체불명의 사물이 공중에 떠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본다고 느끼지만, 대상으로 꽉 찬 시야 어딘가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구멍이 생긴다면, 그 빈 공간은 우리 뇌 속에서 어떤 이미지로 채워질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안이라 생각했던 부분이 밖이 될 수도 있어"라는 아버지의 말은 영화 <매트릭스> 속 모피어스의 말과 유사하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가 객체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고도로 프로그래밍된 매트릭스 안에서, 시스템이 보여주는 것만 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유명한 디즈니랜드 성은 실은 독일의 어느 성을 베낀 것이다. 하지만 복제가 어디 디즈니랜드에만 있던가? 유럽의 유명한 건축물을 베낀 건물은 미국 곳곳에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유럽 문명의 복제로 출발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인 셈이다. 디즈니랜드는 이를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유치함은 디즈니랜드에만 있고, 그 밖의 세계는 마치 유치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듯이…….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3』, 휴머니스트, p326
때때로 안과 밖의 경계는 다분히 기만적이며, 또한 허구적이다. 앎의 경계는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단단한 줄만 알았던 인식의 벽이 실은 빈약한 상상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은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기존 인식 틀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하는 대신 현상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이에 반해 영화는 어리지만 냉철하고 지적인 소년 아오야마의 눈을 빌려 안팎을 가르는 경계의 허구를 해체하려 든다. 미지의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편견 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므로, 영화가 택한 소년의 맑은 관점은 꽤나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펭귄 하이웨이>의 철학적, 미학적 모티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세계관은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차용한 듯 보이는데, '안이라 생각했던 부분이 밖이 될 수 있다'는 말 자체가 명백히 <뫼비우스의 띠> 개념의 변용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닫힌 생태계라 할 수 있는 숲 속 개울물이 그 속에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는 우치다(아오야마의 친구 2)의 발견 또한 에셔의 <폭포>나 <계단 오르내리기> 등의 역설적 작품들을 떠오르게 한다. 에셔는 뫼비우스의 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작품 <뫼비우스의 띠>의 모티브는, 아래 이미지에 보이는 대로, '경계'가 아닌 '순환'이다.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그의 작업은 곧 3차원 현실에서 구현이 불가능한 순환 이미지를 2차원의 평면에 나타내는 작업으로 옮아갔다. 그의 작품 <폭포>를 보면 흐르는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물이 다시 돌고 돌아 폭포 위쪽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는 영화에서 우치다가 발견한 숲 속 개울물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가 아는 과학적 법칙에 명백히 위배되는 현상이지만, 진실의 영감이 언제나 엄밀한 과학적 검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밖에도 영화 후반부에서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수십, 수백 마리의 펭귄들이 떠오르듯 표현된 이미지는 마그리트의 유명한 <골 콩드>를 연상시킨다. 실은 영화 속 '바다'의 모습도 역시 마그리트의 대표작 <피레네의 성>의 초현실적 이미지에서 참고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유사한데, 이미 익숙한 미학적 개념과 이미지들이 연이어 등장한 탓에 그리 놀랍지는 않다.
끝으로 이 영화가 아이들이 보기에 다소 지루하고 난해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물론 그럴 수도 있으나, 애니메이션이라 해서 반드시 아이들에게 흥미로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다. 게다가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에게는 이 영화의 발상이 꽤나 훌륭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가치 있는 지식이 교육과정의 형태로 고정되어버린 시대에 새로운 앎의 대상과 그로 인한 호기심이 얼마나 신선한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꽤나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현실과 공상을 적당히 버무려 색다른 질감을 연출한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 영화는 시종 지적인 개념과 미학적 이미지로 관객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야기 속 소년의 엉뚱한 매력과 연구에 임하는 진중한 자세를 연출하는 방식 또한 탁월하다.
결국 관점의 문제이다. 영화는 소년의 편견 없는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얼마나 경이로운 탐구의 대상인지를, 소년의 성장과정과 함께 매우 엉뚱하면서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그 주관적 감각의 세계를 이렇듯 섬세한 스케치로 표현해낸 감독의 역량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