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Nov 30. 2018

기억 셋. 술

술상을 들고 달리던 날들

초등학생 때 술이란 걸 처음 마셔봤다. 시골 작은할아버지가 드시던 막걸리를 몰래 한 모금 들이켜본 것이 내 인생의 첫술이다. 술을 마셨다고 할 수도 없는, 조촐하고 은밀한 한 모금.


처음으로 '한 잔' 마셔봤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은 18살의 수학여행에서 만들어졌다. 담임 선생님이 숙소를 돌면서 우리 반 친구들에게 양주를 한 잔씩 따라주셨는데, 전에 술을 마셔본 적 없는 친구들은 주량을 알 수 없으니 1/3잔 정도로 맛만 보게 하셨다. 그때 마신 1/3잔이 내 인생의 공식 첫 잔이다.


이후 수능을 치른 다음부터 졸업하기까지 겨울 동안 술 마실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중 가장 즐겁고 짜릿했던 기억은 동네 골목 어귀에서 술상에 주전부리 깔아놓고 마시던 소주였다. 가장 친한 친구들과 말 그대로 길바닥에 술상을 차려놓고 앉아서 먹고 마셨다. 한 친구의 부모님이 워낙 관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에서 매번 술상과 술, 안주를 얻어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우리가 길바닥에 술상을 차리는 줄은 미처 모르셨을 것이다.


친구 부모님 덕에 술과 안주는 구했지만 다른 어른들의 눈까지 개무시할 수는 없었다. 낮은 담과 허름한 지붕들로 둘러쳐진 시골 동네에서 우리를 모르는 어른들은 별로 없었다. 우리끼리 동네 길바닥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으면 그걸 곱게 볼 어른들도 몇 없을 터였다. 처음엔 논두렁 깊숙이 들어가 촛불이나 랜턴을 켜고 조용히 술을 마셨다. 그 작은 불빛도 어른들의 눈에 띌까 봐 우리는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더 즐거웠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스릴 아닌가.


위험한 행동도 계속하면 대범해진다. 논두렁에 자리를 잘 잡고 몸으로 가리면 촛불을 켜놔도 어지간해선 안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점점 논두렁 바깥쪽까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술자리가 무사히 파할 때마다 우리는 '아 이게 생각보다 안전하구나'하는 확신에 사로잡혔고, 급기야 가로등 조명이 잘 닿지 않는 길가에까지 진출했다. 논두렁을 벗어난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우리가 술상을 들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아도 길은 길이다. 추운 겨울이라 사람은 안 다녀도 차는 간간이 다녔던 골목이었다. 저 멀리 누런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보일 때마다 우리는 술자리를 잠시 중단하고 술과 안주를 상째로 들고 튀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십 분, 십오 분에 한 번 꼴로 튀면서도 우리는 또다시 길가에 술상을 차렸다. 한 번씩 달릴 때마다 침이 새어 나올 정도로 셋이 같이 웃었다.


어느 조용한 술집에서 한 잔 걸치다 문득,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온몸으로 촛불을 가리며 술을 따르던 그 날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세 친구가 동시에 뿜어내던 한겨울의 입김처럼, 추억이 뭉근하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 둘. 맷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