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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31. 2019

여행기 1

여행의 이유

요즘엔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대체로 비슷비슷합니다. 적어도 주요 여행국이라 불리는 나라와 도시들에서 그렇죠. 사람들은 대부분 쌀과 밀, 감자와 옥수수로 만든 음식을 먹습니다. 음식점에선 익힌 고기와 생선, 맥주와 포도주를 팔죠. 옷은 주로 바지와 셔츠,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추운 날엔 익숙한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두툼한 외투를 입습니다. 사람들은 네모 반듯한 주택이나 아파트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고 주말엔 산책과 운동을 합니다. 도시는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나뉘어 형성되어 있고, 거리에선 사람과 차들이 각자 익숙한 규칙에 따라 통행합니다. 즉, 우리는 어떤 나라에 직접 가지 않고도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 매체가 부지런히 전해주는 바,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서울부산에 거주하는 시민은 뉴욕과 런던, 베를린과 시드니에서도 얼마든지 정착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며칠 혹은 몇 달 간의 여행을 위해 직접 다른 나라에 갑니다. 직접 가서 봐도 충격적으로 새롭다거나 하는 건 많지 않죠. 그럼 왜 가는 걸까요. 여행을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현대 사회의 문화적 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다시피 고대와 중세 시대의 여행은 주로 중대한 외교적 업무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여행이라고 해도 거기엔 어떤 역사적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죠. 지금도 그런 업무와 사명감으로 여행하는 사람이 있지만, 절대적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저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 그 자체가 목적인 거죠. 이게 가능해진 이유가 바로 문화적 유행이라는 겁니다. 요컨대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세계 어딜 가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비슷한 이유는 서구적 생활양식이 세계를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걸 세계화라 부르는데, 보다 정확히는 서구화라 부르는 것이 맞겠죠. 다른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각 나라 고유의 전통이란 영역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나라의 뿌리와 정체성을 위해 애써 지키고 보전해야 하는 가치가 된 거죠. 그만큼 현시대의 지배적 흐름과 생각과 문화는 대부분 서구에서 시작되어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외국의 호텔과 휴양지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오는 문화도 마찬가지죠. 휴가철 인천공항의 기록적인 인파는 이 문화가 우리나라에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유럽 사람들이 여행을 먼저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행 자체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아니라, 단지 현재 사람들이 즐기는 방식의 여행 문화가 어떤 서구적 자유주의 가치들과 흐름을 함께 했다는 거죠. 개인의 자유를 떠받드는 서구적 가치 때문에 우리는(그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 또한) 다른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요즘에 와서야 이게 당연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평범한 시민들은 여가 목적의 외국여행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뭐 그렇다고 서유럽의 이른바 '자유주의 종주국'들에 감사를 표하자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제가 여행을 가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뭔가를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 여행하는 게 아니라 그냥 놀러 가는 거죠. 생각 없이 여행 장소를 고르고, 비행기표를 끊고, 출발일이 임박해서 세부 일정을 짜고, 정신없이 짐을 꾸리다 훌쩍 떠나는 과정을 일관적으로 관통하는 목적 따위는 없습니다. 그냥 가서 재밌으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정신없이, 목적 없이 떠난 여행에서도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게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양가 없이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 다음 글부터 하나씩 두서없이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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