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껍데기뿐인 세계

이수진, <우상>, 2019

by 달리

* 스포일러 : 중간



열광할 대상이 필요한 대중은 우상을 소환한다. 소환된 우상은 대중에게 필요한 이미지를 내어주고 대중은 그 이미지를 소비한다. 우상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요구할 때마저도 대중은 인간 그 자체보다는 인간적인 '이미지'를 요구하고 소비한다. 우상이 실제로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본질은 언제나 미디어를 통해 몇 차례 걸러지는 이미지에 있다.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연출해낸 우상은, 그 대가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미지를 철저히 탈피한 사적 세계를 소유한다. 부와 명예가 가져다준 그 사적 공간 안에서만, 우상은 진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영화 <우상>은 대중이 우상을 소비하는 기본 도식 위에서, 그 은밀한 사적 세계를 들여다본다. 구명회(한석규)는 차기 도지사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유력한 정치인이다. 정치인이 정교하게 연출하는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유권자를 겨냥한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꿰뚫고 있는 구명회는 극히 사적인 공간에서조차 공적인 포지션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 도입부에서 그는 스스로 만들어낸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로 자신을 파악하며 시종 둘을 동일시한다. 경험 많은 동료 의원에게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한 것보다는 조금 불편한 것이 낫지요'라고 말하며 윤리적 자신감을 내비치는 구명회의 모습에서 이런 흐트러짐 없는 확신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곧 구명회의 확신을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아들 요한(조병규)이 차로 사람을 치어 죽이고 이를 은폐한 사실을 알게 된 구명회는 그제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낯설게 마주한다. 계획에 없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을 때, 대중에게 보이는 이미지로 먹고사는 우상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구명회는 사고 낸 아들을 자수시키고 도지사 경선 후보 사퇴를 선언하지만 이는 연출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고 직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 부남은 사실 요한이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살아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 살인 행위에 가담하고 사고 장소에 시신을 유기하여 뺑소니 사고로 위장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인 것이다. 구명회의 아내(강말금)는 뺑소니로 자수하는 게 아들의 형량에 유리하다는 구명회의 말을 차갑게 비웃으며 말한다. "당신 정치 인생에 시신 유기보다 뺑소니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잖아." 그렇게 우상의 진짜 삶이 시작된다.


공적인 영역에서 그는 하나뿐인 아들을 자수시킨 양심적이고 청렴한 정치인이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교통사고의 유력한 목격자를 찾아내 제거하려는 용의주도한 추적자이다. 그는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남의 처 최련화(천우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내 부남의 아버지 유중식(설경구)을 찾아간다. 최련화는 사고 직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죄를 위해 찾아간 것처럼 보였던 방문의 진짜 목적은 련화를 추적하기 위한 단서를 얻는 데에 있다. 구명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유중식보다 더 빨리 최련화를 찾아내는 것뿐이다.


여기까지 꽤나 단선적인 초반부의 스토리라인에 영화는 의미심장한 은유와 암시, 상징과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특유의 분위기를 덧입힌다. 영화에 대한 비판이 유효한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큰 흐름에서 무리 없이 읽혀야 할 단순한 내러티브가 난잡한 영화적 장치들에 의해 순간순간 가로막힌다. 갑자기 튀어나온 수수께끼 같은 암시가 그리 멀지 않은 부분에서 설명되거나 극적으로 환기되며 해소되는 지점이 존재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치가 해소되지 않은 채 누적되어 관객의 혼란을 부추긴다.


많은 관객들이 지적하는 대사 전달 문제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앞뒤 문맥이나 어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에서 잘 안 들리는 대사가 나온다고 해도 흐름상 대략적으로나마 이해가 되면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안 들리는 대사를 흐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은 채 불친절하게 서사를 쌓아나간다. 극의 분위기상 중요한 대사임이 틀림없는데도 영화는 이를 전달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긴커녕 방치에 가까운 태도를 고수한다. 듣고서도 이해를 못하는 건 관객이 짊어질 몫이겠으나, 안 들려서 이해할 수 없었다면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가 장르적 쾌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서 여성의 고통을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전시한다는 점이다. 장르 영화의 감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가학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물음은 그 장치가 실제로 유효했느냐는 것이다. 구명회가 최련화를 고문하는 장면, 목 잘린 여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극의 막바지에 최련화가 구명회의 가족 중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행하는 지나치게 가학적인 장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 캐릭터의 역할과 소비 방식에 부합하지 않으며, 관객들이 15세 관람가 영화에 기대하는 수위와도 분명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영화 <우상>이 갖는 뚜렷한 장점이 있다면, 긴 러닝타임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강한 긴장감과 흡인력이다. 영화 속 우상의 의미는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쉽사리 잊히지 않을 만큼 관객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다. 영화 속 주요 장면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해석이 모두 가능하고 어떤 경우에는 해석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이는 영화의 제목인 '우상'과 맞물려 '의미 없음'이라는 주제에 대한 발상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최련화에 의해 심각한 화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구명회는 여전히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우상의 삶을 살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구명회가 토해내는 열변이 아무 뜻도 없는 개 짖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점이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프롬프터 속에는 돈도 많으면서 왜 성형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굴에 화상을 입었음에도 대중 앞에 서서 당당히 연설하고 있다는 이미지일 뿐이니까. 결국 이번에도 컨텐츠는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는다. 어느 동료 의원의 말처럼 구명회에게는 '드라마'가 있고, 대중들은 그저 기가 막힌 드라마를 소비하고 만족하면 그만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 주고 이익을 취하는 거래의 당사자일 뿐이다. 물론 그 안에 '의미'란 존재할 수 없다. 구명회의 연설은 아무 의미도 없다.


우상은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고 해결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합리적,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고 맹목적 믿음을 부추기는 기능을 수행한다. 대중의 욕망을 대리 배설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우상은 기꺼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광대가 된다. 우상의 삶에 천착할수록 가면 의 본능도 커져가고, 삶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영역(이미지와 본능)으로 거칠게 쪼개진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공간에 우상화된 자기 이미지를 들여놓은 사람은, 그 이미지를 박탈당했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실체가 드러난 아이돌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한 본능을 이미 확인했다. 영화 속 구명회도 마찬가지. 최련화는 자신을 감금하고 고문한 구명회의 체취를 기억했고, 기어이 그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우상화된 정체성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버린 구명회는 이후에도 계속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이어갈 것이고, 대중들은 또다시 그 내용 없는 이미지를 우러러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마른 껍데기뿐인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처 : 영화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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