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시마 테츠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6
* 스포일러 : 약함
어릴 땐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 어른이 되면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사실 아이든 어른이든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은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릴 땐 별 근거 없이도 행복한 미래를 확신하다가 어른이 되면 쉽사리 행복해질 수 없는 현실을 차갑게 깨달아간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는 미래의 행복한 모습을 그리고, 어른은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을 되새긴다.
어릴 땐 행복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매일같이 분초 단위로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흔하디 흔한 것이 다 행복이었다. 절망도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일에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며 비참하게 울기도 했다.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었기 때문에 삶은 늘 웃음과 울음으로 가득했다.
마츠코(나카타니 미키)의 삶이 그렇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불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마츠코는 철저히 불행한 그녀의 삶 안에서 온갖 종류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웃음과 울음을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때때로 과장되는 마츠코의 감정은 그녀의 아이 같은 면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홍역을 치르듯 불행을 치러낼 때마다 또다시 다음 행복을 기다리는 그녀의 천진한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우리 지난 어린 시절과 닮아서일까.
용서할 수 없는 걸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의 사랑이야.
젊은 마츠코는 긴장하면 안면근육이 우스꽝스럽게 변해버리는 마비질환을 앓고 있다. 어릴 적 무뚝뚝한 아버지를 웃게 만들려고 흉내 내던 익살스러운 표정이 습관으로 굳어진 탓이다. 아버지가 무뚝뚝한 이유는 마츠코의 동생 쿠미코(이치카와 미카코) 때문이다. 몸이 약해 집안의 걱정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쿠미코 때문에, 건강하고 씩씩한 마츠코는 늘 말괄량이 큰딸 역을 맡아야 했다. 동생을 사랑하는 마츠코는 성인이 되기까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낸다. 그리고 이는 마츠코가 일생동안 겪을 불행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마츠코의 불행을 성역화한다. 태생적으로 불행한 가정사를 지닌 마츠코는 이후 이어지는 삶에서도 번번이 실패한다. 사랑과 낭만에 대한 마츠코의 믿음은 매번 보란 듯이 배신당한다. 전능한 존재가 미리 정해둔 것이 아니고서야 삶의 잔혹함이 이리도 지독하게 한 사람만 향할 수는 없다. 결국 영화 속 마츠코의 불행은 영화 밖의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위한 희생의 성격을 띤다. 종교적 서사에서나 쓰일 법한 극단적 불행과 고난의 성역화가 바로 이 영화의 주재료이자 주요 기법인 셈이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의 초반부에서 고등학교 교사인 마츠코에게 누명을 씌워 치명적 상처를 안겼던 제자 류(이세야 유스케)가 후반부에 다시 나타나 그녀에게 용서받는다. 이후 신의 기대를 저버리고 떠난 인간이 세상을 방황하고 돌아와 다시 안기는 종교적 서사구조가 무리 없이 흘러간다. 돌아온 류는 마츠코가 원치 않는 야쿠자 조직생활을 이어가지만 마츠코는 이 모든 고난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그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영화는 이런 마츠코의 헌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이고 단호한 선언의 형태로 표현한다. "용서할 수 없는 걸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의 사랑이야."
마츠코를 기독교적 신의 위치에 대입하고 영화를 관람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모든 삶의 우연과 변수가 실로 꿰듯 단번에 이해된다. 순결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마츠코의 행동은 모두 신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츠코를 향한 사람들의 부정적 시선과 손가락질은 거꾸로 그녀의 행위를 신성화하는데 기여하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마츠코의 고난과 역경, 희망과 좌절은 인간에게 배신당하면서도 끝내 기대를 놓지 않는 신의 자비와 인내에 포개어지며 빛을 발한다. 이것이 영화의 기본 도식인데, 여기에 동화 같은 색감의 연출과 독특한 화면 구성,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동요의 선율이 영화의 인상을 차별화해내는 데 성공한다. 다만 엔딩 시퀀스 연출까지 내달리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각인되는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강박적 주입에 가까운 메시지 전달은 적지 않은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밖에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영화를 포함한 창작예술 분야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대한 요구는 물론 정당하다. 하지만 창작자의 입장에서 그런 요구에 미리 부응하여 표현 내용이나 수단에 스스로 제약을 가하기는 어렵다. 그건 제 손발을 묶은 채로 작업을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예술이 현실의 비루함을 효과적으로 폭로할 수 있다고 믿는 창작자들의 경우에는 PC에 대한 요구가 모욕에 가깝게 들릴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가 그런 리얼리즘을 추구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군데군데 등장하는 폭력적 묘사와 여성의 대상화는 10년 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비판의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그런 장면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고 느꼈다. 정치적 올바름을 빈틈없이 추구하는 가운데 훌륭한 창작물이 완성되는 것은 물론 반가운 일이겠지만, 때때로 가치 있는 작품은 흙 속의 진주처럼 온갖 더러운 것들 속에서 탄생하기도 한다는 점 또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